蜩與學鳩笑之曰 奚以之九萬里而南爲。
조여학구소지왈 해이지구만리이남위.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그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무엇 하러 구만 리나 올라 남쪽으로 간다는 말인가?
구만 리를 오르는 붕의 비상을 보고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웃는다.
저렇게 멀리 가서 무엇 하려는가?
우리는 훌쩍 날아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으면 그만인데...
그들은 자기 세계 안에서는 옳다.
느릅나무와 박달나무 가지 사이가 그들의 세계이고,
그 안에서 구만 리 비상은 불필요한 과장으로 보인다.
문제는 자기 범위를 세계 전체로 착각하는 데 있다.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자신들이 낮게 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높은 비상을 ‘높은 비상’으로 보지 않고 ‘쓸데없는 짓’으로 본다.
이것이 작은 앎의 특징이다.
작은 앎은 단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 채 판단한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냉소로 덮어 버린다는 점이다.
여기서 장자는 조롱의 심리를 깊이 건드린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종종 조롱으로 바꾼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허황된 소리야.”
이런 말은 실제로 정당한 비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세계를 흔드는 낯선 가능성을 막아 내는 방어이기도 하다.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웃는가?
웃음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조롱하는 순간, 그는 배우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기 세계의 크기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조롱은 종종 이해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 부족의 방어다.
정말 아는 사람은 낯선 것을 만나도 곧바로 비웃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일수록 빨리 웃는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급히 비웃을 때,
그 밑에 흔들림이 깔려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유난 떤다”고 깎아내리는 사람,
새로운 시도를 “뻔한 짓”이라 단정하는 사람,
진지한 물음을 “피곤한 소리”라 밀어내는 사람.
그 조롱의 밑바닥에는 대개 자기가 가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그러니 장자의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바깥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영역에서는 낮은 가지의 새다.
무언가를 비웃고 싶어질 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정말 알고 비웃는가,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에 비웃는가?
그 한 번의 물음이,
웃음으로 닫아 버린 문을 다시 연다.
이동헌 대표의 출간 예정 에세이.. <애쓰지 않는 마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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