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명리학이 운명학으로서 5000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 각각의 다름을 세분화해서 가장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첫 번째는 사람은 각각이 정말 다르다는 점이며 또 한 가지는 그 다름을 60년이라는 사주의 반복주기를 발견해서 518,400가지의 생년월일시로 나누고 통계내서 다름을 증명하며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교훈을 하나 얻어야 한다. 그건 사람이 각각 다르다는 건 사는 방법도 달라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우리는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직업 집단을 볼 때 겉으로 보기엔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쉬는 날 같이 쉬고, 일하는 날 같이 일하고, 심지어는 패션 스타일도 같아 보이지만 식사하러 가보면, 휴가 가는 곳을 보면, 취미 생활하는 걸 보면, 또 결혼이나 그 가족들을 보면 하나하나가 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획일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 와서는 이런 사람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남자들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아직도 '여자는 어때야 해!'라든가 '어떻게 살아야 해!' 하는 획일의 잣대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필자가 예전에 개벽에 대해 설명드리면서 신분제가 파괴된 게 약 120년 전 갑오동학농민혁명과 미국의 노비해방운동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남녀평등의 역사는 이 노비해방과 평등의 역사보다 훨씬 짧다. 신분제 개혁은 노비 안 쓰고 노비와 같은 장소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갑질이나 비정규직 차별 등의 사회적인 이슈가 들끓을때만 아니면 그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남녀평등보다 쉽고 빠르게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120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계층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다른 의미의 계층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남녀평등은 법으로 선규제할 수 없는 가정과 개개인의 사적 영역에서부터 출발하므로 제대로 된 평등이 과연 올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게 페미니즘 성향이다. 페미니즘을 두고 페미니즘 성향이라고 굳이 따로 말하는 이유는 최근 한국에서 불거진 각종 페미니즘 관련 사건들이 과연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여성들에 의한 것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성향은 분명 다른데.. 페미니즘은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을 또 하나의 존귀한 개체로 보는데서 출발하지만 페미니즘 성향은 남녀가 동일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워마드로 불리는 국내 페미니즘 성향들을 보면 최근 반일 운동으로 유니클로를 불매하자.. 구매인증을 하고 난리다. 위안부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편에 선다는 건 현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집단일 뿐이란 증거다.

두 남자가 있을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 올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서로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딴짓을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음양에서 음이 먼저 이듯 내성적이기 때문에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들리면 달라진다.


'두 분  힘센 분이 좀 들어 올려 주세요!"


이 소리를 듣게 되면 남자 둘 다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또 지지 않기 위해 서로 들어 올리려고 한다. 이게 남자이고 이것이 양의 특성이다. 남자는 양이므로 기본적으로 발산을 하려 한다. 그러므로 힘을 쓰는 것을 선천적으로 좋아한다. 아니 힘을 발산을 하지 않으면 못 산다. 양의 근본이 발산이기에 그걸 못하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남자들이 이렇게 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는 남자분이 있다면 당신은 사주상 남성성이 약한 사람이거나 이기적인 성향이 강해서 그렇다.


두 여자가 있을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 올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서로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딴짓을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음양에서 음이 먼저 이듯 내성적이기 때문에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들리면...


'두 분  힘센 분이 좀 들어 올려 주세요!"


이 소리를 들어도 두 여자는 가만있는다. 아니 끝까지 자신이 하지 않기 위해 버틴다. 외모에서 신체 크기의 차이가 나더라도 속으론 자신이 더 약하다고 생각한다. 이게 여자이고 음의 특성이다. 여자는 음이므로 기본적으로 가만있으려고 하고 수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힘을 쓰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한다. 그리고 발산을 많이 하면 병이 난다. 음의 근본이 수렴이기 때문에 그 반대를 하면 몸과 정신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여자들이 이렇게 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저런 상황이 발생하면 둘이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한다. 여성은 자신의 힘만으로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걸 선천적으로 알기 때문에.. 힘을 합하는 협동이 잘되는 것이다. 나는 둘 다 아닌데..라고 생각하시는 여자분이 있다면 당신은 사주상 남성성이 강한 사람이거나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있을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 올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역시나 서로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딴짓을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음양에서 음이 먼저 이듯 내성적이기 때문에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들리면 달라진다.


'두 분  힘센 분이 좀 들어 올려 주세요!"


이 소리를 들으면 여자분은 당연히 가만히 있고 남자분은 일어서서 그 물건을 들어서 올릴 것이다. 여자분이 보기에 남자가 아이거나 아주 노약자 거나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가 힘쓰는 일을 맡게 된다. 런던에서 25년간 사신 도서 사업하시는 여자 사장님과 얘길 하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2층 버스 1층에 타서 앉아 있다가 남자 노인분이 비실비실 타시길래 자리를 양보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이 노인분이 크고 단호한 음성으로  '노우, 노, 노, I am a Man!' 하더란다. 필자는 그냥 신사의 나라 답다고 생각했는데.. 예의 바른 나라 한국 지하철 풍경을 보면.. 못 앉아서 난리인 남자 노인들이 임산부석까지 차지하고 가는 걸 보면 참.. 저 삶은 뭘까?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 사회의 무엇이 인간의 본성인 성적인 자존심까지 버리게 만들었을까?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이 아동기에 듣는 가장 뿌듯한 말이 엄마를 챙기는 행동을 하면서 '엄마 나도 남자야! 엄마는 내가 지켜'란 말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아이도 가지고 있는 성적인 우월감과 자존감을 잊게 된 건.. 자기 힘으론 아무도 지키지 못함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의 집권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독재권력의 인간의 존엄성 따윈 무시하는 절대적인 권력에 기생하거나 세뇌된 인간들은 중성화 수술된 개처럼 자존심 따윈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저렇게 임산부 자리라도 앉아서 가기 위해 핏대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타는 지하철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 인간적으로 짠하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 남성의 성적인 자존감과 우월감은 선천적으로 약한 여성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방식으로 작용해 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성의 힘이 여성을 보호하는 게 아닌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여성은 남성보다 약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객관적인 힘으로 남성과 여성은 분명히 극명한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근대까지 큰 트러블이 없이 살아왔다. 이유는 서로의 성적인 역할을 제대로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잔다르크가 전해오는 거의 유일한 여성 전쟁영웅인 이유는 여성임에도 남다른 전투력을 가진 별종이었을 것이고, 거기에 여성만이 가진 능력을 전쟁에서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여성들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과거엔 지구의 2/3는 항상 전쟁 중이었다. 사람들은 과거의 전쟁이 현대의 전쟁 같았을 것이라 착각하는데, 이유는 시간과 거리를 무시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쟁은 A나라가 B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10년을 준비하고 A나라 군대가 B나라로 이동하는데 1년이 걸리고 전쟁을 하는데도 또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기본 몇십 년은 하고 100년 전쟁도 흔했다. 모든 전쟁이 백병전이었기 때문에 군사의 수가 전쟁의 승리를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전쟁을 준비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군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는데.. 방법은 출산을 더 하거나 용병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가서 적의 목을 하나 베는 것보다 전쟁을 할 수 있는 출산을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임무였다. 여성이 역사적으로 많이 보이지 않는 건 이런 이유라고 보는 게 적확하다. 그리고 전쟁이 줄어들고 백병전을 하는 전쟁이 사라지면서 여성의 주요 사회적 역할이었던 군인 출산이 필요 없어졌고,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평화의 시대에서의 사회적 역할이 달라진 것이다. 달라진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오랜 일터였던 전쟁터 마저 사라진 남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형태로 나타나자 경쟁력 떨어지는 일부 남성들에 의해 여성 혐오가 시작되었고, 가정 폭력에 의해 차상위계층으로 내몰린 여성을 위한 일부 정책이 이슈화되면서 여성 혐오가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 페미니즘 성향의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있는 능력을 발굴할 의지가 없는 남성들이 기름을 퍼부어 이슈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이 여성을 견제하기 이전에 이미 여성이 여성을 견제하는 문구가 있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이 말은 직장에서 여자 상사나 동료가 여자 후배나 동료의 사회적인 성공을 막거나 시모가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생각해보면 웃긴다. 이런 논리라면 남자의 적은 남자가 아니란 말인가? 이 말은 남녀 공통에게 해당하니 특별하지 않다. 그러니 이 말도 역시나 여성을 폄하하는 말일뿐이다. 


최근 노브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남자라서 알 수 없지만 손목을 삐었을 때 아대를 몇 시간만 차고 있어도 불편한 기억이 뚜렷한 걸 보면 여성들에게 브라는 그런 불편함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움직임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독일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90년대 초반의 유럽에서는 햇볕만 나면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풀밭이나 강가에 자리를 깔아놓고 일광욕을 했다. 하의까지 탈의하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점차 상의만 탈의하더니.. 최근 유럽을 가보면 비키니 정도를 입고 한다. 그리고 며칠 전 프랑스의 신문기사를 보면 상의탈의 일광욕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이미 상의 탈의 일광욕을 하지 않지만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는 의견 표명이 하지 않는 걸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사는 인스타그램 같은 상업 SNS가 만든 예쁜 몸의 기준에 의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의 몸을 향하고 평가받는 게 부담스러워져서..라고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선택이 탈의하지 않는 것으로 간 것이다. 대세가 되어버린 브라 착용으로 노브라가 특이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시작은 여성 한 명 한 명의 선택이었을 것이란 점이고.. 이런 선택이 대세가 되어버리면 대부분의 여성이 타인의 시선을 이기고 노브라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이다.


양성적인 남성이 양성적인 남성성을 드러내고 살고, 음성적인 여성이 음성적인 여성성을 드러내고 살면.. 서로 불만이 없을 것 같지만 더 양성적인 남성과 덜 양성적인 남성, 오히려 음성적인 남성과 더 음성적인 여성과 덜 음성적인 여성, 오히려 양성적인 여성이 존재하기에 음양의 조화가 항상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 그런데 이런 성적인 부분이 무너져 버리면 덜 양성적인 남성이나 음성적인 남성은 남성하고는 경쟁이 되지 않기에 여성의 자리를 넘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양성적인 여성은 여성에게서 따돌림을 받기에 남성의 자리를 넘보게 된다. 이들이 일으키는 전쟁이 페미니즘 전쟁이고.. 이런 음성적인 남성과 양성적인 여성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여론적 이익을 취하는 게 페미니즘 성향의 언론이나 정치권이다. 이런 분들께 필자가 드리는 제안은... 힘들겠지만 자기 성 안에 머물라는 얘기다. 내가 힘없는 남자라도 여자보다는 힘 있다 생각하고 도와주고, 내가 힘 넘치는 여자라도 편하게 남성이 도움을 준다면 받아라. 그게 여의치 않을 때만 직접 하면 되지 않겠나? 다시 말하지만 남자는 양이라 힘을 발산해야 살고, 여자는 음이라 힘을 아껴야 산다. 이걸 거슬려는 사람은 그냥.. 힘들다!

언젠가부터 '츤드레, 츤데레'라는 일본말이 유행이다. 다음 검색엔진의 뜻은 '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이 단어는 보기와 다르게 몰래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사용한다. 무뚝뚝해 보이는 주변인들이 사실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란 건 정말 안심되는 일 아닌가? 이 단어가 유행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도움을 받는 사람도.. 구속받기 싫다는 거다. 흔히 SNS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느슨한 인간관계, 구속하지 않는 인간관계라고 하는데, '츤드레' 역시도 그런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단어인 것이고, 현대인들은 그래서 도움은 받고 싶지만 알아서 도와줄, 도움은 주고 싶지만 알려져서 귀찮을 필요 없는.. 그런 걸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현대인들만 그런게 아닌.. 사람이라서 그런거다.

 

요즘 일어나는 여성과 남성의 대립을 보면.. 참 뭐하는 건가.. 싶다.

둘 밖에 없으면서.. 말이다.


 

 

인컨설팅     이동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