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엄청나게 낙담한 얼굴이었던 것 같다. 그림으로 남을 만큼...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고 세상의 틀을 모두 깨어버리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사주는 그와는 전혀 다른 관다에 오히려 세상의 틀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잘 살 수 있는 오행과 행동성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고였으나 전교 2등이 수능을 보지 않고 취업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취업 과정을 통해 중소기업에 취업해서는 회사에서 인정은 받았으나 아이와 막내 취급이 싫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술대학에서 기술을 배운 후 재취업했으나 크게 다르지 않은 대우에 역시나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재교육과 재취업으로 보내버린 5년의 시간... 동기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이거나 취업을 했는데 자신은 가장 바닥이 되어 있었단다. 그래서 그때부터 뒤지고 뒤져서 자신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사람을 찾고, 찾아서 필자 앞에 와 있었다.

 

‘일단 대학을 갑시다. 본인은 관다라서 간판이 없으면 남한테 당당해지지 않아서 계속 이렇게 그만두게 돼요. 전 그걸 피한다, 도망친다고도 말하는데.. 본인 같은 다관의 특징이에요.’

 

이 나이에 어떻게 대학을 가나? 언제 공부해서가고 언제 졸업하나? 이미 늦었는데... 이런 말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가라고 했다. 중퇴를 해도 좋으니 가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에 그래도 마음에 들었고, 다시 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물었다. 패션 쪽이라고 했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될 것까진 아니지만 패션 업계에서 일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공과 기술, 루트를 알려줬다. 본인이 해야되는 거지만 길을 제시해 준다는 건 중요하다. 자신의 사주에 맞는 일을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서다.

 

그해 입시에서 내신과 면접으로 대학에 입학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관련 업계의 알바를 시작했다는 문자가 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일이 너무 바빠져서 학교를 휴학하게 됐다는 문자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 찾아왔다. 3년 만이었는데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잘나가는 사장님이 되어서 온 것이다. 미국과 남미 쪽으로 자신의 브랜드로 수출 위주로 사업을 하고 있단다. 처음엔 알바한 회사 사장님이 차려 준 회사지만 지금은 완전히 자기가 인수했단다.

 

너무나 고맙다고 말했다. 자신의 한계를 알려줘서 간이 작아졌단다. 정말 간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었는데.. 일을 벌여 놓고는 매일매일 숨죽이며 스트레스받았고, 그래서 힘들었는데, 필자에게 상담을 받고 난 후에 그런 게 사라졌단다. 그래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전문대를 가라거나, 패션 관련 기술을 속성으로 배우라거나, 남방과 브라우스 대신 몸매가 드러나는 티를 입고 이마를 드러내고 다니란 말들을 다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전까지는 말 잘 듣는 애로 취급하던 사회가 자신을 주요 인사로 대접하기 시작하더란다. 관다가 관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아마도 사주를 공부하고 계신 분들은 이분의 사주 구성을 조합하고 계실 것 같다. 사주란 게 사주원국을 보고 그 사람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잘되는 걸 보고 사주원국을 구성할 수도 있어서다.

 

이분이 지금처럼 잘되고 당분간 흔들림 없이 유지가 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었던 건, 역시나 사주가 관다라서다. 분위기 파악이 빠른 것이다. 안 된다고 하니 안 되었던 게 필자의 말과 같았고, 그렇다면 이번엔 필자의 말을 따른다면 안 되는 건 다 피하는 것이고, 거기에 잘되는 방법도 추가했으니 잘 될 수밖에 없었단다. 필자가 지적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막연한 기대와 영웅심을 버린 것이 성공 상태 다다른 이유고, 역시나 관다답게 직접 말해주지 않은 추락 예방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단다. 그리고 추락도 유지도 아닌 정체가 무서우니 꾸준히 컨설팅해 달란다.

 

어린 나이에 너무 큰 근자감을 가진 사람이라 상처받을까 조심조심 말해줬었는데, 고맙게도 깔끔하게 인정하고 또 포기하고 이렇게 우뚝선 것이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도 자신의 사주지만.. 사람이라 쉽지 않은데, 이렇게 또 하나의 케이스를 보게 된다.

 

혹시나 필자에게 상담받은 후 선택적 인정을 했던 분들이 계신다면 다시 상담 녹음을 꺼내 들어보시길 바란다. 거기에 여러분의 떡상 정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잘 들어보면 말이다.

 

 

인컨설팅     이 동 헌

 

장자가 말하는 앎이란?

대표님 저서 2026. 7. 23. 17:14 Posted by 인컨설팅

천수를 다하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 앎

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是知之盛也。
종기천년, 이부중도요자, 시지지성야.
그 천수를 다하고 길 중간에서 요절하지 않는 것, 
이것이 앎의 성대함이다.

 

장자는 앎의 성대함을 아주 독특하게 말한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이기는 것도 아니다. 

이름난 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終其天年', 자기에게 주어진 천수를 다하는 것. 

'不中道夭', 길 중간에서 요절하지 않는 것. 

이것이 앎의 성대함이다.


여기서 요절은 단순히 젊어서 죽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생명의 길이 중간에서 끊기는 모든 방식이다. 

몸을 함부로 써서 망가뜨리는 것, 

감정으로 자기를 태우는 것, 

욕망 때문에 삶의 리듬을 잃는 것, 

지식과 명예를 좇다 정기를 소모하는 것, 

하늘의 일을 억지로 바꾸려다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 

이것이 모두 중도에 꺾이는 일이다.

 

장자에게 앎은 양생과 분리되지 않는다. 

진짜 앎은 몸을 살린다. 

삶의 결을 보게 하고, 무리하지 않게 하며, 

해칠 것을 피하게 하고, 때를 알게 한다. 

 

반대로 가짜 앎은 사람을 소모시킨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따지고 더 많이 이기지만, 

몸과 마음은 피폐해진다.


이 점에서 대종사는 양생주와 깊이 이어진다. 

포정은 칼을 오래 보전했다. 

그는 소의 결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종사의 사람은 자기 천수를 보전한다. 

그는 하늘과 사람의 결을 알기 때문이다. 

결을 모르면 칼이 상하고, 

결을 모르면 몸이 상한다.


'知之盛', 앎의 성대함은 생명을 보전하는 데 있다. 

이 말은 현대 지식 사회에 매우 날카롭다. 

우리는 앎을 성과, 논문, 말솜씨, 콘텐츠, 정보량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장자는 묻는다. 

그 앎이 너를 살리는가? 

그 앎이 네 천수를 다하게 하는가? 

아니면 네 정신을 밖으로 내몰고 정기를 수고롭게 하는가?

 

덕충부 마지막의 혜자를 떠올려 보자. 

그는 견백으로 울었다. 

지식은 있었지만, 그 지식이 몸을 보전하지 못했다. 

 

대종사는 그 다음 편으로서 말한다. 

진짜 앎은 생명을 중도에 꺾지 않는다.


여기서 장자는 앎의 기준을 바꾼다. 

앎이 참된가를 판단하려면 

그 앎이 사람을 살리는지 보아야 한다. 

그 앎이 몸을 더 조급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몸의 때를 알게 하는가? 

그 앎이 관계를 더 날카롭게 만드는가,

아니면 관계의 결을 보게 하는가?

그 앎이 나를 더 오만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모르는 것 앞에서 더 조심하게 만드는가?


천수를 다한다는 말도 단순한 장수를 뜻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길을 중간에서 스스로 꺾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망으로 꺾지 않고, 

분노로 꺾지 않고, 

과로로 꺾지 않고, 

이름을 좇는 조급함으로 꺾지 않는다. 

앎이 깊으면 삶은 더 오래 버틴다. 

꼭 생물학적 수명만이 아니라, 

마음의 지속력과 관계의 지속력과 일의 지속력이 길어진다.

 

 

이동헌 대표님의 근간 <장자 강의 2> 中에서...

 

거짓말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보통 
"거짓말하는 놈이 나쁘다"는 데서 생각을 멈춘다. 
당연히 거짓말은 나쁘다.
그런데 필자가 오래 사람을 봐오며 깨달은 건,
거짓말이라는 게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은 하는 사람과 믿어 주는 사람, 
이 둘이 만나야 비로소 굴러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같은 거짓말에 자꾸 속는다면, 
거기엔 속이는 사람의 솜씨만이 아니라 
'속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모진 이야기 같지만, 이걸 알아야 같은 데서 또 안 당한다.
먼저 거짓말하는 사람의 속을 보자.

 

거짓말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지키려는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이용하려는 거짓말이다. 
앞의 것은 혼나는 게 무섭거나 
미움받는 게 두려워서 둘러대는 거다. 
어릴 때 작은 잘못에도 심하게 혼난 사람일수록 
이런 방어적 거짓말이 몸에 배어 있다.
사실대로 말하면 큰일 난다고 배웠으니, 
위기만 닥치면 반사적으로 거짓이 튀어나오는 거다. 
이런 거짓말은 밉긴 해도 이해할 구석이 있다. 

 

문제는 뒤의 남을 이용하려고 작정하고 하는 거짓말이다. 
이건 양심의 문제라 잘 안 고쳐진다. 
그러니 누가 이 두 번째 종류의 거짓말을 반복한다면, 
안타깝지만 그 사람에게 진실을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듣는 쪽이다.

 

사람은 왜 빤한 거짓말에 속을까? 
단순히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 거짓말이 자기가 '믿고 싶은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바람피우는 배우자의 어설픈 변명을 
끝까지 믿어 주는 사람을 보라. 
정말 몰라서 믿는 게 아니다. 
진실을 마주하면 자기 삶이 무너지니까, 
차라리 거짓을 믿는 쪽을 마음이 선택하는 거다. 
거짓말이 통하는 자리에는 
거의 항상 이 '믿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다. 
사기꾼들이 노리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은 상대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정확히 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거짓말에 안 속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내 안의 '믿고 싶은 마음'을 의심하는 거다.
누군가의 말이 너무 달콤하고 너무 내가 바라던 그대로일 때,
바로 그때 한 번 멈춰야 한다. 
'내가 이 말을 믿고 싶어서, 
따져 봐야 할 걸 안 따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필자가 상담에서 늘 강조하는 게 그거다.
말만 듣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해온 행동을 보라고. 
사람은 말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반복된 행동은 거짓말을 잘 못 한다.

 

듣고 싶은 말에 흔들릴 때일수록, 
그 사람이 그동안 실제로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를 
냉정하게 떠올려 보는 것. 

 

그게 거짓에 속지 않는 거의 유일한 방패다.

 

 

궁극의 처세술을 담은 <적당한 거리> 중에서...

 

전자책은 교보문고, 종이책은 https://mmn.kr 에서...

정의하는 순간, 놓치기 시작한다

대표님 저서 2026. 7. 21. 18:35 Posted by 인컨설팅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노자는 오천 자의 책을 여는 첫 문장에서, 

자신이 말하려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먼저 못 박는다. 

기이한 시작이다. 

그러나 이 역설을 통과하지 못하면 

나머지 여든 장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지도를 아무리 정교하게 그린다 해도 지도는 땅이 아니다. 

종이 위의 선은 산의 무게도, 

강의 차가움도 담지 못한다. 

 

말과 개념도 그렇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전체가 아니라 

이름에 담긴 일부만 손에 쥔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라.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것, 

오래된 부부 사이에 남은 것, 

첫사랑의 설렘이 모두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묶이지만, 

그 단어가 각각의 실제를 다 담지는 못한다. 

 

도는 그보다 훨씬 크고 근원적인 것이어서, 

말이라는 그릇에는 결코 다 담기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철학이다.

 

그런데 나는 이 첫 문장을 읽을 때마다

상담의 자리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놀라울 만큼 자주,

자기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 놓고 그 이름 속에 갇혀 산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라서요.'
'나는 원래 의지가 약해요.'
'우리 애는 산만한 아이예요.'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이 문장들은 처음에는 이해를 돕는 지도였다. 

복잡한 자신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지도를 오래 들고 다니다 보면, 

사람은 어느새 땅을 보지 않고 지도만 본다.

 

내향적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자신이 낯선 자리에서 활짝 피어났던 몇 번의 기억을 지운다.

의지가 약하다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십 년째 지속해 온 사실을 세지 않는다.

이름과 어긋나는 증거는 버려지고,

이름에 맞는 증거만 수집된다.

그렇게 이름이 사람을 만들어 간다.


이름 붙이기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이름 없는 삶이란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내가 붙인 이름을 사물 자체라고 믿는 순간, 

나는 정의한 만큼만 보고 정의한 만큼만 살게 된다.


노자의 첫 문장은 그래서 겸손의 선언이다. 

네가 말로 붙잡은 것은 전부가 아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너 자신에 대해서도... 

 

이 겸손을 지닌 사람은 단정하기에 앞서 한 박자 멈추게 된다.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려다가, 

내가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려다가, 

그 정의 바깥에 아직 살아 보지 않은 내가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정의는 편리하다. 

그러나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놓치기 시작한다. 

도덕경의 첫 문장이 오천 자 전체의 문지방인 이유가 여기 있다. 

이름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름 너머의 것을 만날 수 있다.

 

 

이동헌 대표님의 출판 예정 도서로

'노자에게 배우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다투지 않는 삶> 中에서...

 

 

지식을 대하는 자세

대표님 저서 2026. 7. 19. 09:23 Posted by 인컨설팅

다음 주부터 동양과 서양의 고전이 출판되기 시작할 예정이다.

 

단순 번역서부터

직역하고 해석하는 강해서와

직역하고 의역하고 해설하는 주해서의 방식으로

내용과 필요성에 따라 쓰여졌다.

 

30대에 다양한 책 관련 강의를 했을 때 

강의를 위해 써여진 교안이 책으로 출판된다고 보시는 될 듯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같은 강의를 두번한 적은 없어서

교안을 만든다고 바빴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지금의 원고 초안이 될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유는 책을 좀 많이 읽어본 경험으로

고전이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라고 반문이 들어서다.

그래서 필자는 고전을 풀로 다 읽을 게 아니고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읽을 것을 권한 적도 있었다.

굳이 왜, 그걸 다.. 읽기도 힘든 것을..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드는 생각은

그런 생각은 많이 읽은 자의 오만이었다.

오만권은 아니고 2만권을 읽은 필자가 느끼기에

고전 아니라도 최근에 출판된 책이 충분하거나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느낀 건

이미 고전이라는 베이스가 있어서였던 거다.

그리고 고전이 가지는 아우라는 가볍거나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필수적이 핵심적인 것들이 그런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분명한 역할을 한다.

현대어로 어떻게 살지마라라고 말하면 또 그 소리..라며 지겨워 할텐데,

고전에서 어떻게 살지마라는... 그러다가 골로 간다. 이 책이 쓰여지기 이전부터..가 되니깐

똑같이 지겹더라도 그건 진리가 되어 버리니 안 따르기가 너무 찝찝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똑같은 말을 책에서 읽어도 고전이 주는 무게가 훨씬 강하니 흡입과 실천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아래 글은 1740년대 영국의 고위관료였던 체스터필드 백작이 여행 중인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출판된 책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다. 영국에서는 기초 교양서로 불리는 유명한 책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전에 대한 자세와 처세를 알려주는 내용으로 다양한 동서양의 고전을 전해드리려는 필자의 자세도 이와 같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글을 전한다. 

 

 

LETTER 30


BATH, October 9, O. S. 1746

사랑하는 아들에게.

모든 탁월함과 모든 미덕에는 그와 이웃한 악덕이나 약점이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그중 하나로 가라앉고 만다. 관대함은 흔히 낭비로 흐르고, 검약은 인색으로, 용기는 만용으로, 신중함은 소심함으로 흐른다. 그러니 나는 우리의 악덕과 반대되는 것을 피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우리의 미덕을 제대로 다스리는 데 더 큰 분별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악덕은 제 참모습으로 보면 너무나 흉해서 첫눈에 우리를 놀라게 하며, 처음부터 어떤 미덕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를 유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덕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첫눈에 우리를 매혹하고, 알아갈수록 점점 더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다른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이 지나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훌륭한 원인이 낳는 결과를 조절하고 인도할 분별이 필요해진다. 지금 나는 이 논리를 어떤 특정한 미덕이 아니라, 분별의 부족으로 인해 흔히 우스꽝스럽고 비난받을 결과의 원인이 되는 어떤 탁월함에 적용하고자 한다. 바로 큰 학식이다. 이는 건전한 분별을 동반하지 않으면 흔히 우리를 오류와 오만, 현학으로 이끈다. 나는 네가 이 탁월함을 최대한으로 갖추면서도 그 흔한 결점은 없기를 바라니, 내 경험이 줄 수 있는 힌트가 아마 네게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학식 있는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오직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만 말하고, 항소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 그 결과는, 그 모욕에 격분하고 그 억압에 상처 입은 인류가 반발하여, 그 폭정을 떨쳐내기 위해 정당한 권위마저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수록 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 겸손이야말로 네 허영심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확신이 있을 때조차 오히려 의심스러운 듯이 보여라. 진술하되 단언하지 마라. 남을 설득하고 싶다면, 너 자신도 설득에 열려 있는 듯이 보여라.

다른 이들은 자기 학식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흔히 학교 교육에서 그런 것 말고는 들은 것이 없다는 편견에서, 언제나 고대인들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근대인들을 그보다 못한 존재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늘 주머니에 고전 한두 권을 넣고 다니며, 옛사람들의 훌륭한 분별을 고수하고, 근대의 하찮은 것들은 결코 읽지 않으며, 지난 천칠백 년 동안 어떤 예술이나 학문에서도 진보가 없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려 한다. 나는 결코 네가 고대인들과의 친분을 부인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배타적인 친밀함을 자랑하기를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근대인들에 대해서는 경멸 없이, 고대인들에 대해서는 우상화 없이 말하라. 그들 모두를 그 시대가 아니라 그 가치로 판단하라. 그리고 혹시 엘제비르판 고전을 주머니에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여주지도, 언급하지도 마라.

일부 위대한 학자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공적이든 사적이든 삶의 모든 격언을 이른바 고대 저자들 속의 "유사한 사례"에서 이끌어낸다. 첫째로 천지창조 이래로 정확히 똑같은 두 사례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 둘째로 어떤 역사가도 그 모든 정황을 낱낱이 알고 서술한 사례란 결코 없었다는 것... 그러나 추론의 근거로 삼으려면 바로 그 모든 정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사례 자체와 그에 딸린 여러 정황에 대해 스스로 사고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 다만 고대 시인이나 역사가의 권위를 근거로 삼지는 마라. 원한다면 겉보기에 유사해 보이는 사례들을 고려해도 좋으나, 그것을 오직 도움으로만 삼을 뿐 안내자로 삼지는 마라. 우리는 실로 우리의 교육에 의해 너무나 편견에 사로잡혀서,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신격화했듯이 우리는 그들의 광인들을 신격화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고대에 대한 모든 마땅한 존중을 담아, 레오니다스와 쿠르티우스야말로 두드러진 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어느 견실한 현학자는 파운드당 이 펜스짜리 세금에 관한 의회 연설에서, 우리가 조국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하고 견뎌야 할 일의 본보기로 이 두 영웅을 인용할 것이다. 나는 무분별한 학식을 지닌 이들이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을 보아왔기에, 만약 갈리아인들과 전쟁 중일 때 그들 중 누군가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어떤 거위들 덕분에 로마가 "유사한 사례"에서 무한한 이득을 보았다는 이유로 탑에 거위 몇 마리를 길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추론과 이런 식의 화법은 언제나 형편없는 정치가와 유치한 웅변가를 만들어낼 뿐이다.

또 다른 종류의 학식 있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덜 독단적이고 덜 거만하지만 그렇다고 덜 주제넘지도 않다. 이들은 여성들과의 대화조차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절묘한 인용으로 꾸미는, 이른바 수다스럽고 화려한 현학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저자들과 어찌나 친밀해졌는지, 마치 친분을 나타내는 별명이나 애칭으로 그들을 부른다. "늙은" 호메로스라거나, "교활한 녀석" 호라티우스라거나, 베르길리우스 대신 "마로"라거나, 오비디우스 대신 "나소"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것들은 전혀 학식이 없는 멋쟁이들에게도 흔히 모방되는데, 이들은 몇몇 이름과 고대 저자의 몇몇 토막글을 외워서 학자로 통하기를 바라며 아무 자리에서나 부적절하고 주제넘게 늘어놓는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현학이라는 비난을,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하다는 의심을 피하고 싶다면 학식을 과시하는 것을 삼가라. 함께 있는 자리의 언어로 말하되, 순수하게, 다른 것으로 억지로 꾸미지 말고 말하라. 함께 있는 이들보다 결코 더 지혜롭거나 더 유식해 보이려 하지 마라. 네 학식을 마치 회중시계처럼 은밀한 주머니에 간직하라. 그것을 꺼내 시간을 알리며 그저 시계를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지 마라. 몇 시냐고 물으면 알려주되, 야경꾼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매시간 알리지는 마라.

전체적으로 기억해다오. 학식(내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이다)은 갖추지 못하면 부끄러운,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장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언급한 이 오류와 남용 - 너무나 흔히 그것에 따라붙는 - 은 극히 조심스럽게 피해라. 또한 기억하라, 위대한 근대의 지식이야말로 고대의 지식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을. 유럽의 옛 상태보다 지금의 상태를 완벽히 아는 편이 더 낫다. 물론 나는 네가 둘 다 잘 알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방금 신력 17일자 네 편지를 받았다. 지금 네 생활 방식에 큰 다양함이 없다고 고백하기는 하나, 편지 쓸 소재가 부족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매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읽을 테니, 그것에 대한 간략한 서술과 네 자신의 생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편지가 될 것이다. 다만 네가 주제를 원한다니, 독일의 루터파 체제, 그들의 교리, 교회 정치, 성직자의 생계와 권위와 직함에 대해 알려다오.

『비토리오 시리』 전집은 이곳에서 매우 희귀하고 매우 비싼 책이지만 나는 필요 없다. 만약 네 서고가 너무 방대해지면, 라이프치히를 떠날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떠날 때, 당장 필요하지 않은 모든 책을 함부르크를 거쳐 영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만.

天下神器 不可爲也。爲者敗之 執者失之。
천하신기 불가위야. 위자패지 집자실지.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라 억지로 어찌할 수 없다.
억지로 하려는 자는 그르치고, 움켜쥐려는 자는 잃는다.

 

노자는 도덕경 29장에서 천하를 얻으려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천하는 신기(神器), 신령한 그릇이다.

억지로 주무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주무르려는 자는 그르치고 움켜쥐려는 자는 잃는다.

 

모래를 쥐어 본 사람은 안다.

세게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더 빠져나간다.

그리고 노자는 그 이유를 덧붙인다.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強或羸

만물은 저마다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가는 것이 있고 따라가는 것이 있으며,

뜨거운 것이 있고 찬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고 여린 것이 있다.


천하만 신기가 아니다.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그릇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이 그릇을 움켜쥐려다 부순다.
통제하려는 손은 늘 사랑의 얼굴을 하고 온다.

자식이 걱정되어 그의 진로를 쥐고,

배우자가 염려되어 그의 관계를 쥐고,

부하가 미덥지 않아 그의 일을 쥔다.

그러나 쥐는 순간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쥐어진 쪽에서는 숨이 막히기 시작하고,

쥔 쪽에서는 불안이 자라기 시작한다.

통제는 불안을 달래려는 행동인데,

얄궂게도 통제할수록 불안은 커진다.

쥐고 있으니 놓치는 순간이 계속 보이기 때문이다.

 

열 가지를 쥔 사람은 열 가지를 걱정하고,

전부를 쥔 사람은 전부를 걱정한다.

움켜쥔 자가 잃는 것은 모래만이 아니다.

제 마음의 평화부터 잃는다.


혹행혹수(或行或隨), 

저마다 결이 다르다는 말이 처방의 핵심이다. 

통제욕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확신이 있다. 

옳은 길은 하나이고 내가 그것을 안다는 확신이다. 

그래서 앞서가는 아이를 잡아 세우고 느린 아이를 끌고 간다. 

그러나 사람은 규격품이 아니다. 

나는 타고난 결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읽는 일을 업으로 해 왔고, 

그 자리에서 확언할 수 있다. 

남의 결을 제 결대로 펴려는 시도는 예외 없이 실패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상대가 꺾인 경우일 뿐이고, 

꺾인 것은 언젠가 제 값을 청구한다.


그러면 다 놓아 버리라는 말인가? 

아니다. 노자가 버리라 한 것은 세 가지, 

심함과 사치와 지나침이다(去甚 去奢 去泰). 

손을 떼는 것이 아니라 악력을 푸는 것이다. 

방향은 함께 보되 속도는 그의 것으로 두고, 

울타리는 치되 울타리 안에서는 뛰게 두고, 

조언은 하되 결정은 넘겨주는 것. 

쥐는 손과 받치는 손의 차이다. 

받치는 손 위에서 모래는 흘러내리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가장 세게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쥘수록 가까워지고 있는가, 빠져나가고 있는가? 

빠져나가고 있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힘을 푸는 것이다. 

신령한 그릇은 받쳐 든 손에만 머문다.

 

위 글은 필자가 출판을 위해 써놓은 아직 제목도 정하지 못한 노자 도덕경을 베이스로 하는 에세이다.

도덕경은 노자가 나라를 경영하는 군주와 자신을 경영하는 개인에게 바친 글이다.

지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시점에

그렇게 움켜쥐려는 분께 이 글을 드리고 싶다.

 

 

인컨설팅   이  동  헌

 

 

조롱은 이해 부족의 방어일 때가 있다

대표님 저서 2026. 7. 16. 11:34 Posted by 인컨설팅

蜩與學鳩笑之曰 奚以之九萬里而南爲。
조여학구소지왈 해이지구만리이남위.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그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무엇 하러 구만 리나 올라 남쪽으로 간다는 말인가?

 

구만 리를 오르는 붕의 비상을 보고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웃는다. 

저렇게 멀리 가서 무엇 하려는가? 

우리는 훌쩍 날아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으면 그만인데...
그들은 자기 세계 안에서는 옳다. 

느릅나무와 박달나무 가지 사이가 그들의 세계이고,

그 안에서 구만 리 비상은 불필요한 과장으로 보인다.
문제는 자기 범위를 세계 전체로 착각하는 데 있다.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자신들이 낮게 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높은 비상을 ‘높은 비상’으로 보지 않고 ‘쓸데없는 짓’으로 본다.

이것이 작은 앎의 특징이다.

작은 앎은 단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 채 판단한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냉소로 덮어 버린다는 점이다.

 

여기서 장자는 조롱의 심리를 깊이 건드린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종종 조롱으로 바꾼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허황된 소리야.”


이런 말은 실제로 정당한 비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세계를 흔드는 낯선 가능성을 막아 내는 방어이기도 하다.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웃는가?
웃음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조롱하는 순간, 그는 배우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기 세계의 크기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조롱은 종종 이해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 부족의 방어다. 

정말 아는 사람은 낯선 것을 만나도 곧바로 비웃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일수록 빨리 웃는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성급히 비웃을 때,

그 밑에 흔들림이 깔려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유난 떤다”고 깎아내리는 사람, 

새로운 시도를 “뻔한 짓”이라 단정하는 사람, 

진지한 물음을 “피곤한 소리”라 밀어내는 사람. 

그 조롱의 밑바닥에는 대개 자기가 가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그러니 장자의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바깥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영역에서는 낮은 가지의 새다.
무언가를 비웃고 싶어질 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정말 알고 비웃는가,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에 비웃는가?
그 한 번의 물음이, 

웃음으로 닫아 버린 문을 다시 연다.

 

 

이동헌 대표의 출간 예정 에세이.. <애쓰지 않는 마음> 중에서

노자가 정의한 부자란?

대표님 저서 2026. 7. 14. 08:14 Posted by 인컨설팅

부자는 재산이 아니라 셈법이다

知足者富。지족자부.
'만족을 아는 자가 부자다.'

도덕경 33장의 이 네 글자는 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재정의다.

부자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만족을 아는 사람이다.

듣기 좋은 위로처럼 들린다.

가난한 자의 정신 승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산수다.

그리고 그 산수는 냉정하다.

부유감은 분수(分數)다.

가진 것이 분자, 원하는 것이 분모다.

백을 가지고 이백을 원하는 사람의 부유감은 이분의 일이고,

오십을 가지고 오십을 원하는 사람의 부유감은 일,

완전수다.

세상은 분자를 키우는 법만 가르친다.

더 벌고, 더 모으고, 더 불리는 법.

그런데 분자가 커지는 동안 분모가 가만히 있어 주지 않는다는 것,

여기에 이 산수의 함정이 있다.

소득이 오르면 눈도 오른다.

예전에는 없어도 되던 것이 이제는 있어야 하는 것이 되고,

한때 사치이던 것이 어느새 기본이 된다.

쾌락 적응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사람의 뇌에 새겨진 기본 설정이다.

좋은 것은 곧 당연한 것이 되고,

당연해진 것은 더 이상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분자가 두 배가 되어도 분모가 함께 두 배가 되면 부유감은 제자리다.

평생을 달렸는데 제자리인 러닝머신.

더 벌어도 늘 빠듯한 삶의 정체가 이것이다.

지족은 이 러닝머신에서 내리는 유일한 기술이다.

분모를 고정하는 것.

나에게 충분한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것이 분자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자는 벌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충분의 선이 없이 벌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충분선이 있는 사람에게 그 선을 넘는 소득은 전부 잉여의 기쁨이 되지만,

충분선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득도 부족의 증거가 된다.

같은 돈이 한쪽에서는 풍요로 계산되고

다른 쪽에서는 결핍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것은 통장이 아니라 이 계산식이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이 산수를 자주 확인한다.

객관적인 형편과 주관적인 부유감은 놀랄 만큼 따로 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산가가 늘 쫓기듯 살고,

수수한 살림의 사람이 넉넉하게 산다.

전자에게는 분모가 없고 후자에게는 있다.

전자는 얼마가 있어야 충분하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답이 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은 도착이라는 것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니 오늘 해 볼 계산은 이것이다.

나의 충분은 얼마인가?

체적으로, 숫자로, 어떤 살림이면 나는 족한가?

이 물음에 답을 가진 사람은 이미 절반쯤 부자다.

도착 지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만족을 아는 것은 야망의 포기가 아니라 도착의 기술이다. 

분모 없는 부는 아무리 커도 허기이고, 

분모 있는 삶은 소박해도 잔치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배운 <상하지 않고 오래가는 법>' 중에서...

본 책은 이동헌대표님의 신간 에세이로 7말8초에 출판예정입니다.

헤어질 결심

컨설팅사례보고 2026. 7. 10. 17:40 Posted by 인컨설팅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많아도,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는 의외로 드물다. 

 

다들 어떻게 좋은 사람을 만날지는 고민하면서, 
어떻게 나쁜 관계를 끝낼지는 잘 배우지 못한다. 

 

그런데 필자가 상담을 하며 절감한 건, 
사람을 가장 망가뜨리는 게 잘못된 만남보다 
'끝내야 할 관계를 못 끝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끝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관계에 질질 끌려다닌다. 
왜 그럴까? 끝내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쏟은 것이 아까워서다.
사람들은 흔히 "여기까지 왔는데", "이만큼 참았는데", 
"들인 시간이 얼만데" 하며 못 떠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이미 쏟아부은 시간과 마음은 
떠나든 안 떠나든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돌아오지 않을 과거가 아까워서, 
돌아올 수도 있는 미래까지 같은 관계에 갈아 넣는다. 
밑 빠진 독에 이미 부은 물이 아까워서, 
남은 물까지 계속 붓는 격이다. 

 

냉정하게 따지면, 
지금 결정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쏟았나'가 아니라 
'지금부터 이 관계가 나에게 어떨까'여야 한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판단해야 한다는 거다.
두 번째 이유는 익숙함이다. 

 

사람은 익숙한 고통을 낯선 평온보다 편하게 느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아무리 힘든 관계라도 익숙해지면, 
그걸 끝내고 혼자가 되는 낯선 상태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사람만 한 사람도 없다", 
"혼자가 되면 어떡하지" 하며 또 주저앉는다. 

 

특히 앞에서 말한 혼자 있는 능력이 약한 사람일수록 
이 함정에 잘 빠진다. 
혼자가 무서워서, 
나를 아프게 하는 관계라도 붙잡고 있는 거다. 

 

그러니 헤어질 결심은 사실 
혼자서도 괜찮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혼자 설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해치는 관계를 끊어 낼 수 있다.

 

그럼 어떤 관계를 끝내야 하나?
필자가 사람들을 보며 세운 기준은 단순하다.

 

첫째, 나를 위험하게 하는 관계. 몸이든 마음이든, 
폭력이 있는 관계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끝내야 한다. 
"변하겠다"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듯 말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행동으로 확인할 일이지, 매번 믿어 줄 일이 아니다. 

 

둘째, 함께 있을수록 내가 점점 작아지고 망가지는 관계. 
좋은 관계는 함께할수록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데, 
나쁜 관계는 함께할수록 내가 자꾸 초라해지고 비참해진다.
그 방향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갉아먹는 관계다.

 

끝내는 일에도 태도가 있다. 
잘 헤어지는 것도 능력이다. 
미워하며 헤어지면 그 미움이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니 가능하면, 
상대를 악마로 만들지 않고 헤어지는 게 좋다.
"저 사람은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결론 내려야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미움을 연료로 떠나면 
그 미움이 다음 관계까지 오염시킨다.
"이 사람과 나는 여기까지였다, 서로 안 맞았을 뿐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건강한 마무리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잘 끝낸 사람이 다음을 잘 시작한다. 

 

그러니 끝내야 할 관계라면, 너무 늦지 않게, 
그러나 너무 모질지 않게 끝내는 법을 배워 두자.

 

 

이동헌이 전하는 대인관계에서  손해보지 않는 궁극의 처세 에세이

<적당한 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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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거리>는 현대인이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명리학적인 지식을 배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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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부부나 연인이 싸울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그때 네가 분명히 그랬잖아."
"내가 언제? 네가 그랬지."

 

분명히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이 겪은 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기억은 마치 서로 다른 사건을 말하는 것처럼 어긋난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대개는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진심으로 자기 기억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 기억이 애초에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녹화 영상처럼 생각한다.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해 둔 장면을 나중에 그대로 꺼내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기억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새로 조립된다.
어떤 일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 장면을 다시 짜 맞춘다. 그 과정에 지금의 감정, 그동안 쌓인 해석, 내가 믿고 싶은 결론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서운했던 사람은 상대의 차가운 말투를 중심으로 기억을 짠다. 억울했던 사람은 자기가 참았던 순간을 중심으로 기억을 짠다.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입장에 맞게 점점 더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처음부터 빈틈투성이다.
우리는 겪은 일을 전부 저장하지 못한다. 띄엄띄엄 남은 조각 사이의 빈 곳을 나중에 그럴듯한 이야기로 메운다. 이 작업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실제로 겪은 부분과 나중에 채워 넣은 부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분명히 기억해"라는 강한 확신이 꼭 정확한 기억의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여러 번 곱씹은 기억일수록 여러 번 다시 조립됐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굳게 믿는 "그때 그랬잖아"가 사실은 내가 여러 번 고쳐 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걸 알면 관계의 싸움에서 중요한 깨달음이 생긴다.
과거의 사실을 끝까지 가리는 일이 늘 의미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자기 기억을 진실로 믿고 있다. 그 믿음은 거짓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 기억의 성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누가 정확히 기억하느냐"를 끝까지 따지면 둘 다 지친다.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은 두 영상을 들고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이냐고 싸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관계를 살리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때 정확히 누가 맞았는가"가 아니라, "그 일로 우리는 무엇을 느꼈는가"로 옮겨 와야 한다.
"그때 네가 틀렸어"는 싸움을 부른다.
하지만 "그 일로 나는 많이 서운했어"는 대화가 될 수 있다.

 

과거의 사실은 합의가 안 돼도, 지금의 감정은 나눌 수 있다. 같은 자리를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어긋난 기억은 싸움거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기억은 못 맞춰도 마음은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이걸 아는 관계는 오래간다.

 

 

이동헌 대표가 전하는 '궁극의 처세서' <적당한 거리> 중에서...

<적당한 거리>는 7월 출판 예정입니다.

유치한 ‘무섭노’ 일베 타령...

Eastlaw Bizstory 2026. 7. 6. 14:44 Posted by 인컨설팅

무섭노가 경상도 사투리라고 하는 경상도 사람,, 특히 방송이고 유튜브고 신문이고 떠드는 사람에게
‘니는 무섭노 써봤나?’
라고 물으면 썼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다. 사투리 연구하는 사람도 어느 지방에선 썼다더라, 언어학자들은 어떨 때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근데 지가 써본 적은 없는 말이다. 50년 이상 다양한 지역의 경상도 사람들을 만나온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고 써본 적 없는 말이니.. 써봤다면 한번 보자 입 밖으로 써봐라.. 어떻게 쓰는지? ㅋㅋㅎ
 
그런데 사실 경상도 사람이 특정 상황... 특히나 무서울 때 못 쓸 말도 아니다. 언어는 얼마든지 유용될 수 있지 않나? 그래서 그 말을 쓴다고 일베니 뭐니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근데 정말 경상도 사람이 그 말을 친구한테 하면 어떤 반응일까?
 
“무섭노.”
“뭐어? 니 와 말을 빙시같이 하노? 뭐 잘못 뭇나?”
 
대충 이렇거나 말실수 정도로 여길 것이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게 경상도 정서다.
 
사투리로 뜬 연예인이 있다. 근데 그런 말을 쓴다. 근데 그런 말을 실제 20대들이 쓰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끝에 ‘노’를 붙이는 그런 경우... 그래서 20대가 듣기 싫어하는 지적질을 했다.. 그 말은 일베들이 쓰는 말이니, 헷갈렸을 수도 있으니 쓰지 말자.. 그런... 이런 지적질은 괜찮지 않나?
 
문제는 이게 왜 이리 커져서 온 대한민국 인터넷과 방송을 장악했느냐다. 그리 만드는 건 일베들이 잘하는 짓이고 극우들이 잘하는 짓이다.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극좌’란 단어가 떠 다니는 걸 보고다. 일베를 지적하면 극좌가 되는 세상을 누군가는 만들고 싶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그거 아나? 이미 자본주의가 대중화된 지금은 극좌도 좌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이유는 지금 노동조합 파업을 보면 알 수 있다. 더 이상 몸 성한 사람들의 집합은 호응을 얻지 못한다. 다들 경쟁하는데 같은 몸으로 베니핏을 달라는 말이 안 통한다.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거다.
 
그 말이 아니라면.. 정치적 목적?... 그런 거겠지.
 
일베를 지적하는 건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된다. 이유는 그 집단이 추구하는 바가 인간을 조롱하고 함께 비웃는 반인류적인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니 이번 일은 그런 비인류의 일원에 나도 모르게 속할 뻔한 미래가 창창한 아이돌을 구제해 주려는 착한 의도라 생각된다. 일베라 낙인을 찍었다거나 일을 키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비판을 하려 했다면, 더구나 경상도 사람들이 제대로 비판을 하려고 했다면.. 일베를 비판했어야 한다. 이것들이 어디 반인류에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하고 말이다. 그게 아닌 걸 보면 이 일을 키우는 애들도 일베이거나 일베를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애들일 것이다. 모두가 비인간적인 것들이다.
 
좀 자세히 들어가 보면.. 최근 일베 논란이 있었던 곳이 두 곳이다. 배재고 스타벅스가야지와 김부장.. 그쪽도 함께 움직였나? 그런 생각까지 든다. 그러니 자중해라. 어차피 밑천 드러날 것들이...^^
 
 
 
인컨설팅    이 동 헌
 
 

잔소리는 왜 효과가 없는가?

컨설팅사례보고 2026. 7. 1. 12:02 Posted by 인컨설팅

세상의 모든 잔소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효과가 없다는 거다.


부모는 자식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


"공부 좀 해라"
"정리 좀 해라"
"술 좀 줄여라." 

 

그런데 그렇게 말해서 정말 바뀌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거의 없다. 

 

오히려 잔소리를 들을수록 더 안 하거나, 
더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효과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끝없이 잔소리를 한다. 
왜 효과가 없는지, 그리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면,
우리는 입은 아끼고 관계는 살릴 수 있다.

 

먼저 왜 잔소리가 효과가 없는지 보자.
잔소리를 듣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면 답이 나온다. 
잔소리는 본질적으로 "너는 틀렸다, 부족하다"는 메시지다.
아무리 좋은 뜻이어도, 
받는 사람에게는 비난과 평가로 들린다.
그리고 사람은 평가받는다고 느끼면 
마음의 문을 닫고 방어부터 하게 된다. 

 

그러니 잔소리를 들으면,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또 시작이네" 하며 귀를 닫는 거다. 
옳은 말이어도 잔소리의 형태로 오면 안 들린다. 

 

형태가 내용을 죽이는 거다.
더 깊은 문제가 있다.
사람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는 거다. 
자율성을 침해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원래 하려고 했던 일도, 누가 "그거 해라" 하고 
잔소리하면 갑자기 하기 싫어진다. 
청개구리 심보 같지만, 이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느낌, 
이게 사람에겐 아주 중요하다. 

 

잔소리는 그 느낌을 빼앗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왜 자꾸 시켜?"
하는 반발심이, 정작 해야 할 일까지 안 하게 만드는 거다. 
그래서 잔소리는 효과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종종 역효과까지 낸다.

 

게다가 잔소리는 관계까지 망친다. 
잔소리를 자주 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늘 평가받고 감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 사람 앞에서는 편하지가 않다. 

 

그래서 잔소리하는 사람을 점점 피하게 된다. 
자식이 부모를 멀리하고, 
배우자가 대화를 피하는 데는, 
끊임없는 잔소리가 큰 몫을 한다. 

 

고치려고 한 말이 사람을 고치기는커녕 
멀어지게만 하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앞에서 고치려 들지 말고 비춰 주라고 했던 
그 원리가 여기서도 답이다. 
잔소리 대신 두 가지를 권한다.

 

첫째, 정말 중요한 것 하나만 말하고 나머지는 참는 거다. 

열 가지를 다 잔소리하면 하나도 안 들리지만, 
정말 중요한 하나만 진지하게 말하면 그건 들린다. 
잔소리는 양이 많을수록 무게가 가벼워진다.

 

둘째, 지적하기보다 인정하고 부탁하는 거다.
"왜 또 안 치웠어"가 아니라 
"치워 주면 내가 정말 편할 것 같아." 
명령이 아니라 부탁으로, 
비난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 말하는 거다. 
사람은 비난받으면 저항하지만, 
부탁받으면 들어주고 싶어 한다. 

 

똑같은 내용도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잔소리가 되기도 하고 부탁이 되기도 한다. 
잔소리를 줄이는 건 말을 참는 게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는 진짜 방법을 아는 것이다.

 

이동헌의 긍극의 처세에세이... <적당한 거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