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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대하는 자세

대표님 저서 2026. 7. 19. 09:23 Posted by 인컨설팅

다음 주부터 동양과 서양의 고전이 출판되기 시작할 예정이다.

 

단순 번역서부터

직역하고 해석하는 강해서와

직역하고 의역하고 해설하는 주해서의 방식으로

내용과 필요성에 따라 쓰여졌다.

 

30대에 다양한 책 관련 강의를 했을 때 

강의를 위해 써여진 교안이 책으로 출판된다고 보시는 될 듯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같은 강의를 두번한 적은 없어서

교안을 만든다고 바빴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지금의 원고 초안이 될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유는 책을 좀 많이 읽어본 경험으로

고전이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라고 반문이 들어서다.

그래서 필자는 고전을 풀로 다 읽을 게 아니고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읽을 것을 권한 적도 있었다.

굳이 왜, 그걸 다.. 읽기도 힘든 것을..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드는 생각은

그런 생각은 많이 읽은 자의 오만이었다.

오만권은 아니고 2만권을 읽은 필자가 느끼기에

고전 아니라도 최근에 출판된 책이 충분하거나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느낀 건

이미 고전이라는 베이스가 있어서였던 거다.

그리고 고전이 가지는 아우라는 가볍거나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필수적이 핵심적인 것들이 그런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분명한 역할을 한다.

현대어로 어떻게 살지마라라고 말하면 또 그 소리..라며 지겨워 할텐데,

고전에서 어떻게 살지마라는... 그러다가 골로 간다. 이 책이 쓰여지기 이전부터..가 되니깐

똑같이 지겹더라도 그건 진리가 되어 버리니 안 따르기가 너무 찝찝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똑같은 말을 책에서 읽어도 고전이 주는 무게가 훨씬 강하니 흡입과 실천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아래 글은 1740년대 영국의 고위관료였던 체스터필드 백작이 여행 중인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출판된 책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다. 영국에서는 기초 교양서로 불리는 유명한 책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전에 대한 자세와 처세를 알려주는 내용으로 다양한 동서양의 고전을 전해드리려는 필자의 자세도 이와 같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글을 전한다. 

 

 

LETTER 30


BATH, October 9, O. S. 1746

사랑하는 아들에게.

모든 탁월함과 모든 미덕에는 그와 이웃한 악덕이나 약점이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그중 하나로 가라앉고 만다. 관대함은 흔히 낭비로 흐르고, 검약은 인색으로, 용기는 만용으로, 신중함은 소심함으로 흐른다. 그러니 나는 우리의 악덕과 반대되는 것을 피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우리의 미덕을 제대로 다스리는 데 더 큰 분별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악덕은 제 참모습으로 보면 너무나 흉해서 첫눈에 우리를 놀라게 하며, 처음부터 어떤 미덕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를 유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덕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첫눈에 우리를 매혹하고, 알아갈수록 점점 더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다른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이 지나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훌륭한 원인이 낳는 결과를 조절하고 인도할 분별이 필요해진다. 지금 나는 이 논리를 어떤 특정한 미덕이 아니라, 분별의 부족으로 인해 흔히 우스꽝스럽고 비난받을 결과의 원인이 되는 어떤 탁월함에 적용하고자 한다. 바로 큰 학식이다. 이는 건전한 분별을 동반하지 않으면 흔히 우리를 오류와 오만, 현학으로 이끈다. 나는 네가 이 탁월함을 최대한으로 갖추면서도 그 흔한 결점은 없기를 바라니, 내 경험이 줄 수 있는 힌트가 아마 네게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학식 있는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오직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만 말하고, 항소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 그 결과는, 그 모욕에 격분하고 그 억압에 상처 입은 인류가 반발하여, 그 폭정을 떨쳐내기 위해 정당한 권위마저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수록 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 겸손이야말로 네 허영심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확신이 있을 때조차 오히려 의심스러운 듯이 보여라. 진술하되 단언하지 마라. 남을 설득하고 싶다면, 너 자신도 설득에 열려 있는 듯이 보여라.

다른 이들은 자기 학식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흔히 학교 교육에서 그런 것 말고는 들은 것이 없다는 편견에서, 언제나 고대인들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근대인들을 그보다 못한 존재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늘 주머니에 고전 한두 권을 넣고 다니며, 옛사람들의 훌륭한 분별을 고수하고, 근대의 하찮은 것들은 결코 읽지 않으며, 지난 천칠백 년 동안 어떤 예술이나 학문에서도 진보가 없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려 한다. 나는 결코 네가 고대인들과의 친분을 부인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배타적인 친밀함을 자랑하기를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근대인들에 대해서는 경멸 없이, 고대인들에 대해서는 우상화 없이 말하라. 그들 모두를 그 시대가 아니라 그 가치로 판단하라. 그리고 혹시 엘제비르판 고전을 주머니에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여주지도, 언급하지도 마라.

일부 위대한 학자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공적이든 사적이든 삶의 모든 격언을 이른바 고대 저자들 속의 "유사한 사례"에서 이끌어낸다. 첫째로 천지창조 이래로 정확히 똑같은 두 사례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 둘째로 어떤 역사가도 그 모든 정황을 낱낱이 알고 서술한 사례란 결코 없었다는 것... 그러나 추론의 근거로 삼으려면 바로 그 모든 정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사례 자체와 그에 딸린 여러 정황에 대해 스스로 사고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 다만 고대 시인이나 역사가의 권위를 근거로 삼지는 마라. 원한다면 겉보기에 유사해 보이는 사례들을 고려해도 좋으나, 그것을 오직 도움으로만 삼을 뿐 안내자로 삼지는 마라. 우리는 실로 우리의 교육에 의해 너무나 편견에 사로잡혀서,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신격화했듯이 우리는 그들의 광인들을 신격화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고대에 대한 모든 마땅한 존중을 담아, 레오니다스와 쿠르티우스야말로 두드러진 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어느 견실한 현학자는 파운드당 이 펜스짜리 세금에 관한 의회 연설에서, 우리가 조국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하고 견뎌야 할 일의 본보기로 이 두 영웅을 인용할 것이다. 나는 무분별한 학식을 지닌 이들이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을 보아왔기에, 만약 갈리아인들과 전쟁 중일 때 그들 중 누군가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어떤 거위들 덕분에 로마가 "유사한 사례"에서 무한한 이득을 보았다는 이유로 탑에 거위 몇 마리를 길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추론과 이런 식의 화법은 언제나 형편없는 정치가와 유치한 웅변가를 만들어낼 뿐이다.

또 다른 종류의 학식 있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덜 독단적이고 덜 거만하지만 그렇다고 덜 주제넘지도 않다. 이들은 여성들과의 대화조차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절묘한 인용으로 꾸미는, 이른바 수다스럽고 화려한 현학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저자들과 어찌나 친밀해졌는지, 마치 친분을 나타내는 별명이나 애칭으로 그들을 부른다. "늙은" 호메로스라거나, "교활한 녀석" 호라티우스라거나, 베르길리우스 대신 "마로"라거나, 오비디우스 대신 "나소"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것들은 전혀 학식이 없는 멋쟁이들에게도 흔히 모방되는데, 이들은 몇몇 이름과 고대 저자의 몇몇 토막글을 외워서 학자로 통하기를 바라며 아무 자리에서나 부적절하고 주제넘게 늘어놓는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현학이라는 비난을,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하다는 의심을 피하고 싶다면 학식을 과시하는 것을 삼가라. 함께 있는 자리의 언어로 말하되, 순수하게, 다른 것으로 억지로 꾸미지 말고 말하라. 함께 있는 이들보다 결코 더 지혜롭거나 더 유식해 보이려 하지 마라. 네 학식을 마치 회중시계처럼 은밀한 주머니에 간직하라. 그것을 꺼내 시간을 알리며 그저 시계를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지 마라. 몇 시냐고 물으면 알려주되, 야경꾼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매시간 알리지는 마라.

전체적으로 기억해다오. 학식(내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이다)은 갖추지 못하면 부끄러운,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장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언급한 이 오류와 남용 - 너무나 흔히 그것에 따라붙는 - 은 극히 조심스럽게 피해라. 또한 기억하라, 위대한 근대의 지식이야말로 고대의 지식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을. 유럽의 옛 상태보다 지금의 상태를 완벽히 아는 편이 더 낫다. 물론 나는 네가 둘 다 잘 알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방금 신력 17일자 네 편지를 받았다. 지금 네 생활 방식에 큰 다양함이 없다고 고백하기는 하나, 편지 쓸 소재가 부족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매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읽을 테니, 그것에 대한 간략한 서술과 네 자신의 생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편지가 될 것이다. 다만 네가 주제를 원한다니, 독일의 루터파 체제, 그들의 교리, 교회 정치, 성직자의 생계와 권위와 직함에 대해 알려다오.

『비토리오 시리』 전집은 이곳에서 매우 희귀하고 매우 비싼 책이지만 나는 필요 없다. 만약 네 서고가 너무 방대해지면, 라이프치히를 떠날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떠날 때, 당장 필요하지 않은 모든 책을 함부르크를 거쳐 영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만.

스마트팩토리와 노동의 미래에 대한 전망들이 난무하는 요즘이다.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감도 못잡는 대통령 후보들이 그것을 가지고 공약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걸 듣고 그런가 하는 국민들도 구름에 농사짓는 듯 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AI와 경쟁해서 살아남을 직업은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는다. 그까진 아니라도 뭘 해먹고 살아야할지를 많은 분들이 물어오신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물어오겠지 하시지만 오래 사는 시대 아닌가? 그러니 모두가 물어온다. 지금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평생 가는 직업은 몇 안되고, 그 직업도 젊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면 못하게 되니 다른 블루오션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은 이단이나 이단에 가까운 세습하는 교회 목사를 제외하면 스님, 신부, 수녀 같은 종교인 아니면 인기있는 예술가, 실력있는 역술인 정도 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재벌이나 진짜 돈 많은 사람, 부동산 갑부는 빼고 말하면 말이다. 


1차 산업혁명은 1784년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기관이 주도했다. 사람이나 소나 말보다 지치지 않으면서 강력한 힘을 가진 기관이 산업생산에 혁명을 가져온 것이다. 2차 산업혁명은 1870년 전기를 이용한 24시간 대량생산체계가 주도했다. 전기불 덕분에 밤낮없는 생산 및 밤에도 환하게 사람사는 세상이 온 것이다. 3차 산업혁명은 1969년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화, 정보화가 주도했다. 시키면 하는 정도를 컴퓨터와 산업로봇으로 구현한 것이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의 이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서 시공을 초월한 비지니스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산업혁명은 거의 100년 주기이므로 4차 산업혁명은 2070년 정도에 와야 타당하지만 지금을 4차 산업혁명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작년부터 AI가 인간 고유의 영역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인 점과 빅데이터, AR, VR이 비로소 AI와 결합해 인간의 사고영역을 대체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두뇌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이터 분석분야인 암진단과 치료에서는 이미 로봇이 의사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 환자들도 인간 의사의 판단보다 로봇 의사인 닥터왓슨의 판단을 더 신뢰한다고 하니 의사는 미래에 단순히 검진을 위한 서비스 직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로봇을 이용한 제조공정을 말하는 공장 자동화(FA)를 뛰어넘어 수요와 판매 빅데이터를 이용한 실시간 생산 개념의 스마트 공장 역시 4차 산업혁명을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단순히 네트워킹을 통해서 정보를 주고받는 개념을 넘어서 정보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프로세싱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정보를 검색하고 분석하고 다음 프로세싱을 명령하던 인간의 고유영역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좋은 일자리로 알려진 직업들이 불과 몇년 후엔 필요없거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직업이 될 것이란 전망은 확실하다. 이런 이유로 사라질 직업 리스트는 이미 언론에 많이 기사화되고 있으니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그럼 미래엔 어떤 직업들이 살아 남을까? 분명한건 인간이 로봇을 교황이나 달라이라마 급으로 섬기진 않을 것이란 점이다. 지금이야 직립보행 로봇을 보면 신기하다고 '와~' 하겠지만 미래엔 로봇이 아무리 브레이크 댄스 같은 춤을 잘 춰도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기 로봇을 만들어 육상을 시키고, 그 로봇이 인간을 이긴다고 해도 신기해 하는 사람이 않지 않겠는가? 공기반 소리반으로 프로그래밍된 로봇가수가 아무리 노래를 잘불러도 그 로봇가수에게 JYP가 감동받아서 동물적인 반응을 곁들인 칭찬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둑으로 인간과 AI가 경쟁하는 건 바둑이 현재까지는 인간 두뇌의 한계이자 자존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인간의 한계를 확실히 넘어서고 나면 다시 인간 중에서 최고를 찾기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 후엔 바둑두면서 로봇의 조언 즉 컨닝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이 정도면 미래에 살아남을 직업과 새로 탄생할 직업이 보이지 않는가? 


최근 대학들이 인문학 쪽이나 음악, 미술, 무용 관련학과가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없애고 있다. 장담컨데 그런 대학들은 다 망할 것이다. 이유는 그 과들은 로봇이 넘볼 수 없는 직업 세계를 창출하는 학과이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를 예로 들어보자. 필자는 야구를 아주 좋아한다. 한국 프로야구도 역사가 쌓이다 보니 암을 이기고 재활해서 다시 복귀해 좋은 승과를 올리는 선수들이 여럿 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면서 감동을 느낀다. 이런 선수들까진 아니더라도 매년 성실한 몸관리를 통해 꾸준한 승적을 올리는 선수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이들에겐 꿈이란 단어까지 아낌없이 사용하는게 이러한 프로 스포츠다. 그런데... 미국에서 더 인기있는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한국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에서 가장 고연봉인 프로 스포츠지만 한국에선 찬밥이다. 프로야구도 가까운 중국만 가도 아는 사람이 잘 없다. 과거 중국 지인에게서 '겨우 공 좀 빠르게 던진다고 몇백억 연봉을 주는게 말이나 되냐'는 말을 듣고 웃은 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사실 아닌가? 야구공 빠르게 던지는게 인간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어느 팀이 우승하는게 인간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 야구장에서 사는 사람도, 가끔씩 야구를 보는 사람도, 어쩌다 야구장에 끌려간 사람도 야구를 보면 감동도 느끼고, 희열도 느끼고, 거기까진 아니라도 재미를 느낀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희노애락에 죽고 사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 희노애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만 피땀흘려 번 돈이라도 기꺼이 내놓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희노애락은 로봇이 가질 수 없는 감정이다. 최소한 앞으로 30년 이내는 말이다. 지금 대학에서 없어지는 학과들이 지금은 인기가 없을지 몰라도, 한국에선 인기가 없을지 몰라도 지구상 어디선가에서는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기존의 즐길거라가 바닥나게 되면 그 분야로 사람들은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과거에 인기없는 음악장르들이 현재에 각광받는 예는 너무 많지 않은가? 인문 쪽도 마찬가지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문, 예술분야는 AI시대에는 무조건 살아남을 수 밖에 없는 분야다. 여기서 사람들이 한가지 헷깔려하는 경계를 말하자면... 현재의 AI는 빅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이지 감정이 있는 인공지능이 아니란 점이다. 맹자가 말한 인간의 성선설이나 순자가 말한 성악설은 인간이 감정을 가진 동물이란 걸 말하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감정을 가지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란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인공지능으로 특정상황에 감정을 가진 것처럼 표현하게 프로그래밍할 수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하는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위에서 필자가 말한 산업혁명의 주기인 2070년이후나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의 감정을 가진 로봇을 만들려면 2170년 이후인 5차 산업혁명이 와야 가능해질 것이다. 그때까지 지구가 남아있다면 말이다. 필자는 랩을 좋아하지 않지만 요즈음은 랩만 잘해도 몇십억을 버는게 현실이다. 예술이나 스포츠 분야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분야이므로 최근에 없어진 학과의 학생들이 언제 예술인문재벌이 될지 모른다. 그들이 라디오스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대학총장과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을 비판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컴퓨터가 처음 생겼을 때, 인터넷이 처음 보급되었을 때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난무하는 관련용어 때문이었다. 말만 좀 쉬워도 훨씬 배우고 활용하기 편했을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지금 스마트폰 보급율이 인당 1대 이상이 되고 있고 누구나 모바일 인터넷을 하는 시대에 다시 새로운 용어가 쏟아지고 있다. 이 용어를 알면 앞서가는 것이요, 모르면 뒤쳐지는 상황에 다시 직면한 것이다. 실제 이 용어의 의미만 알아도 큰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최소 핸드폰관련 기술 용어만 알아도 씨티폰에 투자해서 망한 사람이 없었을 것처럼 말이다. 미래에 살아남을 직업을 알고 싶다면 따라가는 느낌이라도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얼마전 오래동안 함께한 CEO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필자가 비즈니스 쪽이 아닌 게임 쪽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한 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게임을 즐기지 않아서 그럴 가능성은 낮았지만 미래는 인간이 놀거리를 창출하는 분야가 또하나의 블루오션이기에 그렇하다. 지금이라도 게임 쪽을 하면 되지 않냐고? 그보다 나은 걸 해야지..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이제 다 나온 것 같다. 미래에 살아 남을 직업은 인간과 놀고,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살리는 분야다. 그 분야를 찾아서 집중해 보시길~~~

 

 

 

인컨설팅 연구소    이동헌

 

 

 

차이나는 도올...

Eastlaw Bizstory 2016. 4. 18. 10:12 Posted by 인컨설팅

한 때 도올 김용옥 신드롬이 분 적이 있다. 군사정권시절에도 자신의 소리를 내던 깡말라 꽥꽥거리는 이 분의 강의는 공중파에서 특별기획을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그의 철학과 역사관에 대한 찬반론이 펼쳐졌다. 이분의 강의모습을 따라하는 개그와 성대모사의 대상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시작했던 대부분의 강의는 원래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끝냈다. 유명한 만큼 강의를 끝내지 못할 구설도 따랐던 탓이다. 주로 반발은 동종학계와 보수언론이 진원지였다. 그들의 기득권을 뺏을 정도의 위력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부터 이 분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항상 언론의 중심에서 클릭 메이커였던 이 분의 기사가 뜸해지고 급기야는 사라진 것이다. 이유는 바른소리, 즉 이 시대를 위협하는 소신이 있는 학자였기 때문일거다. 그런 이 분이 JTBC란 이석희의 종편에서 다시 강의를 한다는 예고 방송을 보고는 중국에서 책 쓰신다더니 오셨구나 했다. 그리고 몇 주째 '차이나는 도올'이란 강의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이 방송 강의에서 도올을 보면서 갑자기 공자와 맹자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자신을 알아줄 나라를 찾아 헤메 떠돌던 그 노곤함이 도올에게서 보였던 것이다.

 

도올을 공자에 비유할 정도인가를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다른건 몰라도 공자보다 많이 공부했고 많이 아는 분이란 건 분명하다. 공자시대에 죽편 한수레 해봐야 요즘 두꺼운 책 한권 정도의 정보량이다. 대한민국 대학교수 대부분이 몇년씩 강의노트 토시하나 안바꾸지만 이 분은 어디서 강의를 하던 내용이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넓어진다. 썩은 온고지신으로 밥그릇 챙기는 것들이랑은 분명 차원이 다른 분이다. 예전 어느 한학자분께서 공자가 왜 위대하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내게 던진 적이 있다. 명리학을 파고 있는 명리학자 입장의 답을 요구하신 거다. 내가 드린 답은 '살아남아서 위대하다' 였다. 인간에게 살아남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공자가 아직 살아남아서 위대하다고? 어디 살아 있는데?? 바로 이름이 살아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공자에게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학파를 이끌던 학자 중에서 유독 공자라는 이름이 가장 크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수 없이 유추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공자만이 이름을 제대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남기는데는 수많은 제자들과 후예들의 공헌이 따른 건 물론이다. 이건 예수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를 연구해보면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예수와 같이 자신의 종파를 주장했던 수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예수만이 이름을 남겼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예수 반대파의 기독교 목사들이었다. 공자를 까던 그 학자들은 다 어디갔나? 예수를 못 박았던 그 목사들은 다 어디갔나? 그들은 이름을 남기지 못해 사라졌지만 공자와 예수는 살아남아서 동서양 최고의 학문과 종교를 남겼다. 도올도 좀 더 까인다면 이름 자는 분명히 남길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한다. 대학원 다닐 때 교수에게 물려받은 강의노트 베껴서 우려먹는 것들이 토달 분은 아니란 얘기다.

 

똑같은 사주를 타고 태어나는 사람은 전세계로 보자면 무수히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거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사주팔자로 이름을 남길 성인이 될 지 아는 건 불가능하다. 성인은 타고나는게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가능하단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하면서 자신의 학문분야를 넓혀가는 도올에게서 그런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도올의 강의를 들어보면 한국이 보이질 않는다. 그는 과거엔 한국인과 정치인이 역사인식을 재고해서 경쟁력있는 국민이 되길 주장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강의엔 중국만이 남아있다. 중국을 제대로 알아서 앞으로 세계의 패권을 가질 중국에 편승하자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의 눈은 정확하다. 현재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전쟁 이후의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다. 두갑자마다 순환하는 지구대운으로도 승자는 중국이다. 아랍권의 대규모 유럽이민 이후 유럽의 영향력이 아랍에 까지 뻗혀지고, 중국의 영향력이 아시아 태평양권을 지배하게 되면 자연히 미국은 현재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가 되든 힐러리가 되든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본다. 어차피 둘의 바탕은 백인우월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고립을 자초하게 되고 그 이외의 나라들이 개방, 변화, 소통, 화합할 때 경제패권은 미국의 손을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미약한 개인이고 소시민이다. 지 밥그릇 챙기느라 10년간 퇴보를 거듭한 정치인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 비민주시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는 변하고 있고 경제 패권은 100년만에 미국에서 아시아와 유럽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 속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은 판단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판단. 도올이란 대인은 세계인으로서 중국을 선택한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민족에겐 크나큰 손실이다. 대한민국 만큼 역사와 인문학을 천대하는 나라가 없다고 본다. 교과서 국정화가 그것이고 대학의 인문계열학과 폐지가 또 그것이다. 그런데 그걸 주도하는 것들이 그 과 교수들이다. 지 한번 입신해보겠다고 자신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후안무치한 것들인 것이다. 하지만 역사와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하는 분들의 사주엔 돈이나 명성보단 그것 자체에 대한 희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 볼 프로그램이 이것 하나 밖에 없다. 다음 주부턴 고구려에 대해서 강의하신다고 하니 기대가 더 된다.

 

 

 

인컨설팅 역학연구소    이동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