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하는 순간, 놓치기 시작한다

대표님 저서 2026. 7. 21. 18:35 Posted by 인컨설팅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노자는 오천 자의 책을 여는 첫 문장에서, 

자신이 말하려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먼저 못 박는다. 

기이한 시작이다. 

그러나 이 역설을 통과하지 못하면 

나머지 여든 장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지도를 아무리 정교하게 그린다 해도 지도는 땅이 아니다. 

종이 위의 선은 산의 무게도, 

강의 차가움도 담지 못한다. 

 

말과 개념도 그렇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전체가 아니라 

이름에 담긴 일부만 손에 쥔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라.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것, 

오래된 부부 사이에 남은 것, 

첫사랑의 설렘이 모두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묶이지만, 

그 단어가 각각의 실제를 다 담지는 못한다. 

 

도는 그보다 훨씬 크고 근원적인 것이어서, 

말이라는 그릇에는 결코 다 담기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철학이다.

 

그런데 나는 이 첫 문장을 읽을 때마다

상담의 자리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놀라울 만큼 자주,

자기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 놓고 그 이름 속에 갇혀 산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라서요.'
'나는 원래 의지가 약해요.'
'우리 애는 산만한 아이예요.'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이 문장들은 처음에는 이해를 돕는 지도였다. 

복잡한 자신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지도를 오래 들고 다니다 보면, 

사람은 어느새 땅을 보지 않고 지도만 본다.

 

내향적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자신이 낯선 자리에서 활짝 피어났던 몇 번의 기억을 지운다.

의지가 약하다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십 년째 지속해 온 사실을 세지 않는다.

이름과 어긋나는 증거는 버려지고,

이름에 맞는 증거만 수집된다.

그렇게 이름이 사람을 만들어 간다.


이름 붙이기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이름 없는 삶이란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내가 붙인 이름을 사물 자체라고 믿는 순간, 

나는 정의한 만큼만 보고 정의한 만큼만 살게 된다.


노자의 첫 문장은 그래서 겸손의 선언이다. 

네가 말로 붙잡은 것은 전부가 아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너 자신에 대해서도... 

 

이 겸손을 지닌 사람은 단정하기에 앞서 한 박자 멈추게 된다.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려다가, 

내가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려다가, 

그 정의 바깥에 아직 살아 보지 않은 내가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정의는 편리하다. 

그러나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놓치기 시작한다. 

도덕경의 첫 문장이 오천 자 전체의 문지방인 이유가 여기 있다. 

이름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름 너머의 것을 만날 수 있다.

 

 

이동헌 대표님의 출판 예정 도서로

'노자에게 배우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다투지 않는 삶> 中에서...

 

 

지식을 대하는 자세

대표님 저서 2026. 7. 19. 09:23 Posted by 인컨설팅

다음 주부터 동양과 서양의 고전이 출판되기 시작할 예정이다.

 

단순 번역서부터

직역하고 해석하는 강해서와

직역하고 의역하고 해설하는 주해서의 방식으로

내용과 필요성에 따라 쓰여졌다.

 

30대에 다양한 책 관련 강의를 했을 때 

강의를 위해 써여진 교안이 책으로 출판된다고 보시는 될 듯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같은 강의를 두번한 적은 없어서

교안을 만든다고 바빴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지금의 원고 초안이 될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유는 책을 좀 많이 읽어본 경험으로

고전이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라고 반문이 들어서다.

그래서 필자는 고전을 풀로 다 읽을 게 아니고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읽을 것을 권한 적도 있었다.

굳이 왜, 그걸 다.. 읽기도 힘든 것을..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드는 생각은

그런 생각은 많이 읽은 자의 오만이었다.

오만권은 아니고 2만권을 읽은 필자가 느끼기에

고전 아니라도 최근에 출판된 책이 충분하거나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느낀 건

이미 고전이라는 베이스가 있어서였던 거다.

그리고 고전이 가지는 아우라는 가볍거나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필수적이 핵심적인 것들이 그런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분명한 역할을 한다.

현대어로 어떻게 살지마라라고 말하면 또 그 소리..라며 지겨워 할텐데,

고전에서 어떻게 살지마라는... 그러다가 골로 간다. 이 책이 쓰여지기 이전부터..가 되니깐

똑같이 지겹더라도 그건 진리가 되어 버리니 안 따르기가 너무 찝찝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똑같은 말을 책에서 읽어도 고전이 주는 무게가 훨씬 강하니 흡입과 실천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아래 글은 1740년대 영국의 고위관료였던 체스터필드 백작이 여행 중인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출판된 책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다. 영국에서는 기초 교양서로 불리는 유명한 책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전에 대한 자세와 처세를 알려주는 내용으로 다양한 동서양의 고전을 전해드리려는 필자의 자세도 이와 같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글을 전한다. 

 

 

LETTER 30


BATH, October 9, O. S. 1746

사랑하는 아들에게.

모든 탁월함과 모든 미덕에는 그와 이웃한 악덕이나 약점이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그중 하나로 가라앉고 만다. 관대함은 흔히 낭비로 흐르고, 검약은 인색으로, 용기는 만용으로, 신중함은 소심함으로 흐른다. 그러니 나는 우리의 악덕과 반대되는 것을 피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우리의 미덕을 제대로 다스리는 데 더 큰 분별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악덕은 제 참모습으로 보면 너무나 흉해서 첫눈에 우리를 놀라게 하며, 처음부터 어떤 미덕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를 유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덕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첫눈에 우리를 매혹하고, 알아갈수록 점점 더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다른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이 지나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훌륭한 원인이 낳는 결과를 조절하고 인도할 분별이 필요해진다. 지금 나는 이 논리를 어떤 특정한 미덕이 아니라, 분별의 부족으로 인해 흔히 우스꽝스럽고 비난받을 결과의 원인이 되는 어떤 탁월함에 적용하고자 한다. 바로 큰 학식이다. 이는 건전한 분별을 동반하지 않으면 흔히 우리를 오류와 오만, 현학으로 이끈다. 나는 네가 이 탁월함을 최대한으로 갖추면서도 그 흔한 결점은 없기를 바라니, 내 경험이 줄 수 있는 힌트가 아마 네게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학식 있는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오직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만 말하고, 항소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 그 결과는, 그 모욕에 격분하고 그 억압에 상처 입은 인류가 반발하여, 그 폭정을 떨쳐내기 위해 정당한 권위마저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수록 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 겸손이야말로 네 허영심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확신이 있을 때조차 오히려 의심스러운 듯이 보여라. 진술하되 단언하지 마라. 남을 설득하고 싶다면, 너 자신도 설득에 열려 있는 듯이 보여라.

다른 이들은 자기 학식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흔히 학교 교육에서 그런 것 말고는 들은 것이 없다는 편견에서, 언제나 고대인들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근대인들을 그보다 못한 존재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늘 주머니에 고전 한두 권을 넣고 다니며, 옛사람들의 훌륭한 분별을 고수하고, 근대의 하찮은 것들은 결코 읽지 않으며, 지난 천칠백 년 동안 어떤 예술이나 학문에서도 진보가 없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려 한다. 나는 결코 네가 고대인들과의 친분을 부인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배타적인 친밀함을 자랑하기를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근대인들에 대해서는 경멸 없이, 고대인들에 대해서는 우상화 없이 말하라. 그들 모두를 그 시대가 아니라 그 가치로 판단하라. 그리고 혹시 엘제비르판 고전을 주머니에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여주지도, 언급하지도 마라.

일부 위대한 학자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공적이든 사적이든 삶의 모든 격언을 이른바 고대 저자들 속의 "유사한 사례"에서 이끌어낸다. 첫째로 천지창조 이래로 정확히 똑같은 두 사례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 둘째로 어떤 역사가도 그 모든 정황을 낱낱이 알고 서술한 사례란 결코 없었다는 것... 그러나 추론의 근거로 삼으려면 바로 그 모든 정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사례 자체와 그에 딸린 여러 정황에 대해 스스로 사고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 다만 고대 시인이나 역사가의 권위를 근거로 삼지는 마라. 원한다면 겉보기에 유사해 보이는 사례들을 고려해도 좋으나, 그것을 오직 도움으로만 삼을 뿐 안내자로 삼지는 마라. 우리는 실로 우리의 교육에 의해 너무나 편견에 사로잡혀서,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신격화했듯이 우리는 그들의 광인들을 신격화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고대에 대한 모든 마땅한 존중을 담아, 레오니다스와 쿠르티우스야말로 두드러진 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어느 견실한 현학자는 파운드당 이 펜스짜리 세금에 관한 의회 연설에서, 우리가 조국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하고 견뎌야 할 일의 본보기로 이 두 영웅을 인용할 것이다. 나는 무분별한 학식을 지닌 이들이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을 보아왔기에, 만약 갈리아인들과 전쟁 중일 때 그들 중 누군가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어떤 거위들 덕분에 로마가 "유사한 사례"에서 무한한 이득을 보았다는 이유로 탑에 거위 몇 마리를 길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추론과 이런 식의 화법은 언제나 형편없는 정치가와 유치한 웅변가를 만들어낼 뿐이다.

또 다른 종류의 학식 있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덜 독단적이고 덜 거만하지만 그렇다고 덜 주제넘지도 않다. 이들은 여성들과의 대화조차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절묘한 인용으로 꾸미는, 이른바 수다스럽고 화려한 현학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저자들과 어찌나 친밀해졌는지, 마치 친분을 나타내는 별명이나 애칭으로 그들을 부른다. "늙은" 호메로스라거나, "교활한 녀석" 호라티우스라거나, 베르길리우스 대신 "마로"라거나, 오비디우스 대신 "나소"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것들은 전혀 학식이 없는 멋쟁이들에게도 흔히 모방되는데, 이들은 몇몇 이름과 고대 저자의 몇몇 토막글을 외워서 학자로 통하기를 바라며 아무 자리에서나 부적절하고 주제넘게 늘어놓는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현학이라는 비난을,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하다는 의심을 피하고 싶다면 학식을 과시하는 것을 삼가라. 함께 있는 자리의 언어로 말하되, 순수하게, 다른 것으로 억지로 꾸미지 말고 말하라. 함께 있는 이들보다 결코 더 지혜롭거나 더 유식해 보이려 하지 마라. 네 학식을 마치 회중시계처럼 은밀한 주머니에 간직하라. 그것을 꺼내 시간을 알리며 그저 시계를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지 마라. 몇 시냐고 물으면 알려주되, 야경꾼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매시간 알리지는 마라.

전체적으로 기억해다오. 학식(내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이다)은 갖추지 못하면 부끄러운,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장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언급한 이 오류와 남용 - 너무나 흔히 그것에 따라붙는 - 은 극히 조심스럽게 피해라. 또한 기억하라, 위대한 근대의 지식이야말로 고대의 지식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을. 유럽의 옛 상태보다 지금의 상태를 완벽히 아는 편이 더 낫다. 물론 나는 네가 둘 다 잘 알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방금 신력 17일자 네 편지를 받았다. 지금 네 생활 방식에 큰 다양함이 없다고 고백하기는 하나, 편지 쓸 소재가 부족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매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읽을 테니, 그것에 대한 간략한 서술과 네 자신의 생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편지가 될 것이다. 다만 네가 주제를 원한다니, 독일의 루터파 체제, 그들의 교리, 교회 정치, 성직자의 생계와 권위와 직함에 대해 알려다오.

『비토리오 시리』 전집은 이곳에서 매우 희귀하고 매우 비싼 책이지만 나는 필요 없다. 만약 네 서고가 너무 방대해지면, 라이프치히를 떠날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떠날 때, 당장 필요하지 않은 모든 책을 함부르크를 거쳐 영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만.

天下神器 不可爲也。爲者敗之 執者失之。
천하신기 불가위야. 위자패지 집자실지.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라 억지로 어찌할 수 없다.
억지로 하려는 자는 그르치고, 움켜쥐려는 자는 잃는다.

 

노자는 도덕경 29장에서 천하를 얻으려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천하는 신기(神器), 신령한 그릇이다.

억지로 주무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주무르려는 자는 그르치고 움켜쥐려는 자는 잃는다.

 

모래를 쥐어 본 사람은 안다.

세게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더 빠져나간다.

그리고 노자는 그 이유를 덧붙인다.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強或羸

만물은 저마다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가는 것이 있고 따라가는 것이 있으며,

뜨거운 것이 있고 찬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고 여린 것이 있다.


천하만 신기가 아니다.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그릇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이 그릇을 움켜쥐려다 부순다.
통제하려는 손은 늘 사랑의 얼굴을 하고 온다.

자식이 걱정되어 그의 진로를 쥐고,

배우자가 염려되어 그의 관계를 쥐고,

부하가 미덥지 않아 그의 일을 쥔다.

그러나 쥐는 순간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쥐어진 쪽에서는 숨이 막히기 시작하고,

쥔 쪽에서는 불안이 자라기 시작한다.

통제는 불안을 달래려는 행동인데,

얄궂게도 통제할수록 불안은 커진다.

쥐고 있으니 놓치는 순간이 계속 보이기 때문이다.

 

열 가지를 쥔 사람은 열 가지를 걱정하고,

전부를 쥔 사람은 전부를 걱정한다.

움켜쥔 자가 잃는 것은 모래만이 아니다.

제 마음의 평화부터 잃는다.


혹행혹수(或行或隨), 

저마다 결이 다르다는 말이 처방의 핵심이다. 

통제욕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확신이 있다. 

옳은 길은 하나이고 내가 그것을 안다는 확신이다. 

그래서 앞서가는 아이를 잡아 세우고 느린 아이를 끌고 간다. 

그러나 사람은 규격품이 아니다. 

나는 타고난 결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읽는 일을 업으로 해 왔고, 

그 자리에서 확언할 수 있다. 

남의 결을 제 결대로 펴려는 시도는 예외 없이 실패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상대가 꺾인 경우일 뿐이고, 

꺾인 것은 언젠가 제 값을 청구한다.


그러면 다 놓아 버리라는 말인가? 

아니다. 노자가 버리라 한 것은 세 가지, 

심함과 사치와 지나침이다(去甚 去奢 去泰). 

손을 떼는 것이 아니라 악력을 푸는 것이다. 

방향은 함께 보되 속도는 그의 것으로 두고, 

울타리는 치되 울타리 안에서는 뛰게 두고, 

조언은 하되 결정은 넘겨주는 것. 

쥐는 손과 받치는 손의 차이다. 

받치는 손 위에서 모래는 흘러내리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가장 세게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쥘수록 가까워지고 있는가, 빠져나가고 있는가? 

빠져나가고 있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힘을 푸는 것이다. 

신령한 그릇은 받쳐 든 손에만 머문다.

 

위 글은 필자가 출판을 위해 써놓은 아직 제목도 정하지 못한 노자 도덕경을 베이스로 하는 에세이다.

도덕경은 노자가 나라를 경영하는 군주와 자신을 경영하는 개인에게 바친 글이다.

지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시점에

그렇게 움켜쥐려는 분께 이 글을 드리고 싶다.

 

 

인컨설팅   이  동  헌

 

 

노자가 정의한 부자란?

대표님 저서 2026. 7. 14. 08:14 Posted by 인컨설팅

부자는 재산이 아니라 셈법이다

知足者富。지족자부.
'만족을 아는 자가 부자다.'

도덕경 33장의 이 네 글자는 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재정의다.

부자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만족을 아는 사람이다.

듣기 좋은 위로처럼 들린다.

가난한 자의 정신 승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산수다.

그리고 그 산수는 냉정하다.

부유감은 분수(分數)다.

가진 것이 분자, 원하는 것이 분모다.

백을 가지고 이백을 원하는 사람의 부유감은 이분의 일이고,

오십을 가지고 오십을 원하는 사람의 부유감은 일,

완전수다.

세상은 분자를 키우는 법만 가르친다.

더 벌고, 더 모으고, 더 불리는 법.

그런데 분자가 커지는 동안 분모가 가만히 있어 주지 않는다는 것,

여기에 이 산수의 함정이 있다.

소득이 오르면 눈도 오른다.

예전에는 없어도 되던 것이 이제는 있어야 하는 것이 되고,

한때 사치이던 것이 어느새 기본이 된다.

쾌락 적응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사람의 뇌에 새겨진 기본 설정이다.

좋은 것은 곧 당연한 것이 되고,

당연해진 것은 더 이상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분자가 두 배가 되어도 분모가 함께 두 배가 되면 부유감은 제자리다.

평생을 달렸는데 제자리인 러닝머신.

더 벌어도 늘 빠듯한 삶의 정체가 이것이다.

지족은 이 러닝머신에서 내리는 유일한 기술이다.

분모를 고정하는 것.

나에게 충분한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것이 분자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자는 벌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충분의 선이 없이 벌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충분선이 있는 사람에게 그 선을 넘는 소득은 전부 잉여의 기쁨이 되지만,

충분선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득도 부족의 증거가 된다.

같은 돈이 한쪽에서는 풍요로 계산되고

다른 쪽에서는 결핍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것은 통장이 아니라 이 계산식이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이 산수를 자주 확인한다.

객관적인 형편과 주관적인 부유감은 놀랄 만큼 따로 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산가가 늘 쫓기듯 살고,

수수한 살림의 사람이 넉넉하게 산다.

전자에게는 분모가 없고 후자에게는 있다.

전자는 얼마가 있어야 충분하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답이 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은 도착이라는 것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니 오늘 해 볼 계산은 이것이다.

나의 충분은 얼마인가?

체적으로, 숫자로, 어떤 살림이면 나는 족한가?

이 물음에 답을 가진 사람은 이미 절반쯤 부자다.

도착 지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만족을 아는 것은 야망의 포기가 아니라 도착의 기술이다. 

분모 없는 부는 아무리 커도 허기이고, 

분모 있는 삶은 소박해도 잔치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배운 <상하지 않고 오래가는 법>' 중에서...

본 책은 이동헌대표님의 신간 에세이로 7말8초에 출판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