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거리>는 현대인이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명리학적인 지식을 배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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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부부나 연인이 싸울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그때 네가 분명히 그랬잖아."
"내가 언제? 네가 그랬지."

 

분명히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이 겪은 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기억은 마치 서로 다른 사건을 말하는 것처럼 어긋난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대개는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진심으로 자기 기억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 기억이 애초에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녹화 영상처럼 생각한다.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해 둔 장면을 나중에 그대로 꺼내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기억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새로 조립된다.
어떤 일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 장면을 다시 짜 맞춘다. 그 과정에 지금의 감정, 그동안 쌓인 해석, 내가 믿고 싶은 결론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서운했던 사람은 상대의 차가운 말투를 중심으로 기억을 짠다. 억울했던 사람은 자기가 참았던 순간을 중심으로 기억을 짠다.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입장에 맞게 점점 더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처음부터 빈틈투성이다.
우리는 겪은 일을 전부 저장하지 못한다. 띄엄띄엄 남은 조각 사이의 빈 곳을 나중에 그럴듯한 이야기로 메운다. 이 작업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실제로 겪은 부분과 나중에 채워 넣은 부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분명히 기억해"라는 강한 확신이 꼭 정확한 기억의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여러 번 곱씹은 기억일수록 여러 번 다시 조립됐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굳게 믿는 "그때 그랬잖아"가 사실은 내가 여러 번 고쳐 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걸 알면 관계의 싸움에서 중요한 깨달음이 생긴다.
과거의 사실을 끝까지 가리는 일이 늘 의미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자기 기억을 진실로 믿고 있다. 그 믿음은 거짓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 기억의 성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누가 정확히 기억하느냐"를 끝까지 따지면 둘 다 지친다.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은 두 영상을 들고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이냐고 싸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관계를 살리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때 정확히 누가 맞았는가"가 아니라, "그 일로 우리는 무엇을 느꼈는가"로 옮겨 와야 한다.
"그때 네가 틀렸어"는 싸움을 부른다.
하지만 "그 일로 나는 많이 서운했어"는 대화가 될 수 있다.

 

과거의 사실은 합의가 안 돼도, 지금의 감정은 나눌 수 있다. 같은 자리를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어긋난 기억은 싸움거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기억은 못 맞춰도 마음은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이걸 아는 관계는 오래간다.

 

 

이동헌 대표가 전하는 '궁극의 처세서' <적당한 거리> 중에서...

<적당한 거리>는 7월 출판 예정입니다.

얼굴로 사람을 읽는다는 것

컨설팅사례보고 2026. 6. 26. 07:47 Posted by 인컨설팅

필자는 오랫동안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을 해 왔다.
관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뜸 
‘내 얼굴 어때요? 부자 되겠어요?’ 하고 묻는다.
그런데 필자가 얼굴에서 읽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자주 짓는 감정이 고스란히 새겨진다. 

 

늘 찡그리는 사람은 미간에 골이 패고, 
잘 웃는 사람은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잡힌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과 잘 참는 사람은 입매가 다르다.
얼굴은 거짓말을 잘 못 한다.

 

마음이 오래 머문 자리에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 관상이고, 관상을 보는 거다.

 

관상은 미신이 아니라 관찰의 통계인 것이다.
그 관찰에 부자 얼굴도 많긴해서 보면 안다. 근데...
겨우 그거 보는 게 뭐라고 일이라고 했겠나?

 

그런데 사람들은 관상을 잘 모르다 보니, 
관상을 오해하는 면이 크다.

 

관상이라는 학문에는 없는 
미디어나 소설, 요즘은 조회수를 노리는 
엉터리 관상 신문 기사 등에서 픽션으로 사용된 
유사 사이비 관상 이론을 진실이라고 믿고는 
거기서 본 걸 실생활 속에서 써먹는다. 

 

얼굴 한 번 슬쩍 보고는
‘저 사람은 인상이 안 좋아’
‘관상이 사납다’
'무슨 상이라서 어떻고, 무슨 상이라서 어떻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하며 사람을 단정해 버리는 거다.

 

관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얼굴로 사람을 읽는 일은 
그 첫인상의 함정과 아주 가까이 붙어있다. 
그래서 필자는 얼굴을 보는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고 늘 말한다.

 

왜 조심해야 하는가?
첫째, 얼굴은 한 장면이 아니라 
흐름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으로는 사람을 못 읽는다.
가만있을 때의 얼굴, 웃을 때의 얼굴, 
화날 때 일그러지는 얼굴, 
남의 말을 들을 때의 얼굴이 다 다르다.
진짜 그 사람은 이 여러 얼굴의 합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처음 마주친 한 장면, 
그것도 긴장하거나 피곤한 순간의 얼굴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해 버린다. 

 

그건 영화의 한 컷만 보고 
줄거리를 다 안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둘째, 얼굴을 읽는다면서 사실은 
자기 편견을 읽는 경우가 너무 많다. 

 

눈이 작으면 째진 눈이라 사납다 하고, 
광대가 나오면 드세다 하고, 
입이 크면 욕심이 많다 한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나?
대부분이 그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이다.
그 고정관념을 얼굴에 덧씌워 놓고 
"관상을 봤다"고 하는 거다. 

 

이건 얼굴을 읽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편견을 얼굴에 투사하는 것에 가깝다.

잘생긴 사람은 성격도 좋을 거라 믿고, 
인상이 험한 사람은 속도 험할 거라 믿는 그 마음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외모가 호감인 사람에게 
능력이나 인성까지 후하게 점수를 준다. 
면접에서도, 첫 소개팅에서도 이게 작동한다. 
그런데 살아보면 어떤가?

 

얼굴 곱던 사람에게 크게 데이고, 
인상 험하던 사람에게 깊은 정을 받는 일이 
인생엔 수두룩하지 않나? 
츤드레란 단어가 만국 공용어가 된 이유도 이것 아니겠나?

 

그럼, 얼굴을 읽는 일은 다 부질없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제대로만 읽는다면 얼굴은 분명 많은 걸 알려준다. 
다만 그 '제대로'가 어렵다.

 

필자가 권하는 올바른 스텐스는 이거다.
얼굴에서 받은 첫인상은 
'의문의 출발점'으로만 쓰라는 것이다. 
‘이 사람 표정이 좀 굳어 있네’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멈추고 단정하지 말고 
‘원래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궁금해하라는 거다.

 

인상은 가설이고, 
그 가설은 그 사람을 겪어 가며 확인하거나 
수정해야 할 무엇이지, 
처음부터 박제할 결론이 아니라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작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얼굴은 
남의 얼굴이 아닌 나의 얼굴이다. 

 

앞서 말했듯이 얼굴엔 자주 짓는 감정이 새겨진다. 
그 말은 곧,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가 
결국 내 얼굴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남의 관상을 보는 데는 그렇게 열심이면서, 
자기 얼굴에 무엇이 쌓이고 있는지는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매일 짜증과 불만 속에 사는 사람의 얼굴과, 
매일 감사와 호기심 속에 사는 사람의 얼굴은 
십 년 후에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다.
그러니 얼굴 공부의 끝은 결국 자기 마음 공부로 돌아온다.

 

좋은 얼굴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오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의 처세서 <적당한 거리> 중에서... 

<적당한 거리> 는 2026년 7월 출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