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컨설팅사례보고 2026. 7. 10. 17:40 Posted by 인컨설팅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많아도,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는 의외로 드물다. 

 

다들 어떻게 좋은 사람을 만날지는 고민하면서, 
어떻게 나쁜 관계를 끝낼지는 잘 배우지 못한다. 

 

그런데 필자가 상담을 하며 절감한 건, 
사람을 가장 망가뜨리는 게 잘못된 만남보다 
'끝내야 할 관계를 못 끝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끝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관계에 질질 끌려다닌다. 
왜 그럴까? 끝내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쏟은 것이 아까워서다.
사람들은 흔히 "여기까지 왔는데", "이만큼 참았는데", 
"들인 시간이 얼만데" 하며 못 떠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이미 쏟아부은 시간과 마음은 
떠나든 안 떠나든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돌아오지 않을 과거가 아까워서, 
돌아올 수도 있는 미래까지 같은 관계에 갈아 넣는다. 
밑 빠진 독에 이미 부은 물이 아까워서, 
남은 물까지 계속 붓는 격이다. 

 

냉정하게 따지면, 
지금 결정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쏟았나'가 아니라 
'지금부터 이 관계가 나에게 어떨까'여야 한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판단해야 한다는 거다.
두 번째 이유는 익숙함이다. 

 

사람은 익숙한 고통을 낯선 평온보다 편하게 느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아무리 힘든 관계라도 익숙해지면, 
그걸 끝내고 혼자가 되는 낯선 상태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사람만 한 사람도 없다", 
"혼자가 되면 어떡하지" 하며 또 주저앉는다. 

 

특히 앞에서 말한 혼자 있는 능력이 약한 사람일수록 
이 함정에 잘 빠진다. 
혼자가 무서워서, 
나를 아프게 하는 관계라도 붙잡고 있는 거다. 

 

그러니 헤어질 결심은 사실 
혼자서도 괜찮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혼자 설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해치는 관계를 끊어 낼 수 있다.

 

그럼 어떤 관계를 끝내야 하나?
필자가 사람들을 보며 세운 기준은 단순하다.

 

첫째, 나를 위험하게 하는 관계. 몸이든 마음이든, 
폭력이 있는 관계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끝내야 한다. 
"변하겠다"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듯 말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행동으로 확인할 일이지, 매번 믿어 줄 일이 아니다. 

 

둘째, 함께 있을수록 내가 점점 작아지고 망가지는 관계. 
좋은 관계는 함께할수록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데, 
나쁜 관계는 함께할수록 내가 자꾸 초라해지고 비참해진다.
그 방향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갉아먹는 관계다.

 

끝내는 일에도 태도가 있다. 
잘 헤어지는 것도 능력이다. 
미워하며 헤어지면 그 미움이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니 가능하면, 
상대를 악마로 만들지 않고 헤어지는 게 좋다.
"저 사람은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결론 내려야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미움을 연료로 떠나면 
그 미움이 다음 관계까지 오염시킨다.
"이 사람과 나는 여기까지였다, 서로 안 맞았을 뿐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건강한 마무리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잘 끝낸 사람이 다음을 잘 시작한다. 

 

그러니 끝내야 할 관계라면, 너무 늦지 않게, 
그러나 너무 모질지 않게 끝내는 법을 배워 두자.

 

 

이동헌이 전하는 대인관계에서  손해보지 않는 궁극의 처세 에세이

<적당한 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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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거리>는 현대인이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명리학적인 지식을 배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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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부부나 연인이 싸울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그때 네가 분명히 그랬잖아."
"내가 언제? 네가 그랬지."

 

분명히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이 겪은 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기억은 마치 서로 다른 사건을 말하는 것처럼 어긋난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대개는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진심으로 자기 기억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 기억이 애초에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녹화 영상처럼 생각한다.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해 둔 장면을 나중에 그대로 꺼내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기억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새로 조립된다.
어떤 일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 장면을 다시 짜 맞춘다. 그 과정에 지금의 감정, 그동안 쌓인 해석, 내가 믿고 싶은 결론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서운했던 사람은 상대의 차가운 말투를 중심으로 기억을 짠다. 억울했던 사람은 자기가 참았던 순간을 중심으로 기억을 짠다.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입장에 맞게 점점 더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처음부터 빈틈투성이다.
우리는 겪은 일을 전부 저장하지 못한다. 띄엄띄엄 남은 조각 사이의 빈 곳을 나중에 그럴듯한 이야기로 메운다. 이 작업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실제로 겪은 부분과 나중에 채워 넣은 부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분명히 기억해"라는 강한 확신이 꼭 정확한 기억의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여러 번 곱씹은 기억일수록 여러 번 다시 조립됐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굳게 믿는 "그때 그랬잖아"가 사실은 내가 여러 번 고쳐 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걸 알면 관계의 싸움에서 중요한 깨달음이 생긴다.
과거의 사실을 끝까지 가리는 일이 늘 의미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자기 기억을 진실로 믿고 있다. 그 믿음은 거짓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 기억의 성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누가 정확히 기억하느냐"를 끝까지 따지면 둘 다 지친다.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은 두 영상을 들고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이냐고 싸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관계를 살리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때 정확히 누가 맞았는가"가 아니라, "그 일로 우리는 무엇을 느꼈는가"로 옮겨 와야 한다.
"그때 네가 틀렸어"는 싸움을 부른다.
하지만 "그 일로 나는 많이 서운했어"는 대화가 될 수 있다.

 

과거의 사실은 합의가 안 돼도, 지금의 감정은 나눌 수 있다. 같은 자리를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어긋난 기억은 싸움거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기억은 못 맞춰도 마음은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이걸 아는 관계는 오래간다.

 

 

이동헌 대표가 전하는 '궁극의 처세서' <적당한 거리> 중에서...

<적당한 거리>는 7월 출판 예정입니다.

잔소리는 왜 효과가 없는가?

컨설팅사례보고 2026. 7. 1. 12:02 Posted by 인컨설팅

세상의 모든 잔소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효과가 없다는 거다.


부모는 자식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


"공부 좀 해라"
"정리 좀 해라"
"술 좀 줄여라." 

 

그런데 그렇게 말해서 정말 바뀌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거의 없다. 

 

오히려 잔소리를 들을수록 더 안 하거나, 
더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효과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끝없이 잔소리를 한다. 
왜 효과가 없는지, 그리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면,
우리는 입은 아끼고 관계는 살릴 수 있다.

 

먼저 왜 잔소리가 효과가 없는지 보자.
잔소리를 듣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면 답이 나온다. 
잔소리는 본질적으로 "너는 틀렸다, 부족하다"는 메시지다.
아무리 좋은 뜻이어도, 
받는 사람에게는 비난과 평가로 들린다.
그리고 사람은 평가받는다고 느끼면 
마음의 문을 닫고 방어부터 하게 된다. 

 

그러니 잔소리를 들으면,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또 시작이네" 하며 귀를 닫는 거다. 
옳은 말이어도 잔소리의 형태로 오면 안 들린다. 

 

형태가 내용을 죽이는 거다.
더 깊은 문제가 있다.
사람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는 거다. 
자율성을 침해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원래 하려고 했던 일도, 누가 "그거 해라" 하고 
잔소리하면 갑자기 하기 싫어진다. 
청개구리 심보 같지만, 이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느낌, 
이게 사람에겐 아주 중요하다. 

 

잔소리는 그 느낌을 빼앗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왜 자꾸 시켜?"
하는 반발심이, 정작 해야 할 일까지 안 하게 만드는 거다. 
그래서 잔소리는 효과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종종 역효과까지 낸다.

 

게다가 잔소리는 관계까지 망친다. 
잔소리를 자주 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늘 평가받고 감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 사람 앞에서는 편하지가 않다. 

 

그래서 잔소리하는 사람을 점점 피하게 된다. 
자식이 부모를 멀리하고, 
배우자가 대화를 피하는 데는, 
끊임없는 잔소리가 큰 몫을 한다. 

 

고치려고 한 말이 사람을 고치기는커녕 
멀어지게만 하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앞에서 고치려 들지 말고 비춰 주라고 했던 
그 원리가 여기서도 답이다. 
잔소리 대신 두 가지를 권한다.

 

첫째, 정말 중요한 것 하나만 말하고 나머지는 참는 거다. 

열 가지를 다 잔소리하면 하나도 안 들리지만, 
정말 중요한 하나만 진지하게 말하면 그건 들린다. 
잔소리는 양이 많을수록 무게가 가벼워진다.

 

둘째, 지적하기보다 인정하고 부탁하는 거다.
"왜 또 안 치웠어"가 아니라 
"치워 주면 내가 정말 편할 것 같아." 
명령이 아니라 부탁으로, 
비난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 말하는 거다. 
사람은 비난받으면 저항하지만, 
부탁받으면 들어주고 싶어 한다. 

 

똑같은 내용도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잔소리가 되기도 하고 부탁이 되기도 한다. 
잔소리를 줄이는 건 말을 참는 게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는 진짜 방법을 아는 것이다.

 

이동헌의 긍극의 처세에세이... <적당한 거리> 중에서...

오래된 부부나 연인이 싸울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그때 네가 분명히 그랬잖아!"
"내가 언제? 네가 그랬지!"


분명히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이 겪은 일인데,
두 사람의 기억은 마치 서로 다른 사건을 말하는 것처럼 
어긋난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필자가 단언컨대, 대개는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진심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 

 

다만 두 사람의 기억이 
애초에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여기서 '만들어졌다'는 표현을 잘 봐야 한다. 
사람들은 기억을 녹화 테이프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해 둔 영상을 
그대로 꺼내 본다고 믿는 거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새로 조립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어떤 일을 떠올릴 때, 
머릿속에서는 그 장면을 그 자리에서 
다시 짜 맞추는 작업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짜 맞추는 과정에 지금의 감정, 
그동안 쌓인 해석, 듣고 싶은 결론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그러니 같은 대화를 두고도, 
서운했던 사람은 상대의 날 선 말투를 중심으로 기억을 짜고,
억울했던 사람은 자기가 참았던 순간을 중심으로 
기억을 짠다. 

 

시간이 갈수록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입장에 맞게 점점 더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기억은 처음부터 빈틈투성이다.
우리는 겪은 일을 다 담아 두지 못한다.
띄엄띄엄 남은 조각들 사이의 빈 곳을 
나중에 그럴듯한 내용으로 메운다. 

 

이 메우는 작업이 워낙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우리는 실제로 겪은 부분과 
나중에 채워 넣은 부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는 강한 확신은 
기억이 정확하다는 증거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거꾸로일 때가 많다. 
여러 번 곱씹은 기억일수록 그만큼 
여러 번 다시 조립됐다는 뜻이니, 
강하게 확신하는 기억일수록 
원본에서 멀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거다. 

 

이걸 알면 등골이 좀 서늘해진다.
우리가 그렇게 굳게 믿는 "그때 그랬잖아"가 사실은 
내가 여러 번 고쳐 쓴 이야기일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깨달음이 나온다.

 

관계의 다툼에서 "누가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는가"를 
끝까지 가리는 일은 대개 의미가 없다는 거다. 
두 사람 다 자기 기억을 진실로 믿고 있고, 
그 믿음은 거짓이 아니라 
인간 기억의 본래 성질에서 나온 거다. 

 

그러니 과거의 사실을 놓고 끝까지 다투는 건, 
서로 다른 카메라로 찍힌 두 영상을 들고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이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이건 누구나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영원히 결론이 안 나는 과거 어떤 장면의 이유다. 
그러니 서로 자기 기억이 맞다고 끝장을 보려고 할수록 
둘 다 지치기만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권한다.
"그때 정확히 어땠는가"를 두고 다투지 말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로 
대화의 무게를 옮기라고 말이다. 

 

과거의 사실은 합의가 안 돼도, 지금의 감정은 나눌 수 있다.
"그때 네가 틀렸어"는 끝없는 싸움을 부르지만, 
"그 일로 나는 많이 서운했어, 
오해를 없었다면 달랐을 텐데.."는 대화의 시작이 된다. 

 

같은 자리를 다른 카메라로 찍었다는 걸 
둘 다 인정하는 순간, 
두 개의 어긋난 기억은 싸움거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바뀐다. 

 

기억은 못 맞춰도 마음은 맞출 수 있다는 것, 
이걸 아는 부부는 늙어서도 사이가 좋다.

 

 

궁극의 처세서 <적당한 거리> 중에서...

<적당한 거리> 는 2026년 7월 출간 예정입니다.

 

얼굴로 사람을 읽는다는 것

컨설팅사례보고 2026. 6. 26. 07:47 Posted by 인컨설팅

필자는 오랫동안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을 해 왔다.
관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뜸 
‘내 얼굴 어때요? 부자 되겠어요?’ 하고 묻는다.
그런데 필자가 얼굴에서 읽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자주 짓는 감정이 고스란히 새겨진다. 

 

늘 찡그리는 사람은 미간에 골이 패고, 
잘 웃는 사람은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잡힌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과 잘 참는 사람은 입매가 다르다.
얼굴은 거짓말을 잘 못 한다.

 

마음이 오래 머문 자리에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 관상이고, 관상을 보는 거다.

 

관상은 미신이 아니라 관찰의 통계인 것이다.
그 관찰에 부자 얼굴도 많긴해서 보면 안다. 근데...
겨우 그거 보는 게 뭐라고 일이라고 했겠나?

 

그런데 사람들은 관상을 잘 모르다 보니, 
관상을 오해하는 면이 크다.

 

관상이라는 학문에는 없는 
미디어나 소설, 요즘은 조회수를 노리는 
엉터리 관상 신문 기사 등에서 픽션으로 사용된 
유사 사이비 관상 이론을 진실이라고 믿고는 
거기서 본 걸 실생활 속에서 써먹는다. 

 

얼굴 한 번 슬쩍 보고는
‘저 사람은 인상이 안 좋아’
‘관상이 사납다’
'무슨 상이라서 어떻고, 무슨 상이라서 어떻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하며 사람을 단정해 버리는 거다.

 

관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얼굴로 사람을 읽는 일은 
그 첫인상의 함정과 아주 가까이 붙어있다. 
그래서 필자는 얼굴을 보는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고 늘 말한다.

 

왜 조심해야 하는가?
첫째, 얼굴은 한 장면이 아니라 
흐름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으로는 사람을 못 읽는다.
가만있을 때의 얼굴, 웃을 때의 얼굴, 
화날 때 일그러지는 얼굴, 
남의 말을 들을 때의 얼굴이 다 다르다.
진짜 그 사람은 이 여러 얼굴의 합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처음 마주친 한 장면, 
그것도 긴장하거나 피곤한 순간의 얼굴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해 버린다. 

 

그건 영화의 한 컷만 보고 
줄거리를 다 안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둘째, 얼굴을 읽는다면서 사실은 
자기 편견을 읽는 경우가 너무 많다. 

 

눈이 작으면 째진 눈이라 사납다 하고, 
광대가 나오면 드세다 하고, 
입이 크면 욕심이 많다 한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나?
대부분이 그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이다.
그 고정관념을 얼굴에 덧씌워 놓고 
"관상을 봤다"고 하는 거다. 

 

이건 얼굴을 읽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편견을 얼굴에 투사하는 것에 가깝다.

잘생긴 사람은 성격도 좋을 거라 믿고, 
인상이 험한 사람은 속도 험할 거라 믿는 그 마음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외모가 호감인 사람에게 
능력이나 인성까지 후하게 점수를 준다. 
면접에서도, 첫 소개팅에서도 이게 작동한다. 
그런데 살아보면 어떤가?

 

얼굴 곱던 사람에게 크게 데이고, 
인상 험하던 사람에게 깊은 정을 받는 일이 
인생엔 수두룩하지 않나? 
츤드레란 단어가 만국 공용어가 된 이유도 이것 아니겠나?

 

그럼, 얼굴을 읽는 일은 다 부질없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제대로만 읽는다면 얼굴은 분명 많은 걸 알려준다. 
다만 그 '제대로'가 어렵다.

 

필자가 권하는 올바른 스텐스는 이거다.
얼굴에서 받은 첫인상은 
'의문의 출발점'으로만 쓰라는 것이다. 
‘이 사람 표정이 좀 굳어 있네’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멈추고 단정하지 말고 
‘원래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궁금해하라는 거다.

 

인상은 가설이고, 
그 가설은 그 사람을 겪어 가며 확인하거나 
수정해야 할 무엇이지, 
처음부터 박제할 결론이 아니라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작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얼굴은 
남의 얼굴이 아닌 나의 얼굴이다. 

 

앞서 말했듯이 얼굴엔 자주 짓는 감정이 새겨진다. 
그 말은 곧,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가 
결국 내 얼굴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남의 관상을 보는 데는 그렇게 열심이면서, 
자기 얼굴에 무엇이 쌓이고 있는지는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매일 짜증과 불만 속에 사는 사람의 얼굴과, 
매일 감사와 호기심 속에 사는 사람의 얼굴은 
십 년 후에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다.
그러니 얼굴 공부의 끝은 결국 자기 마음 공부로 돌아온다.

 

좋은 얼굴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오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의 처세서 <적당한 거리> 중에서... 

<적당한 거리> 는 2026년 7월 출간 예정입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도사님들을 보면 대부분 동안이셨다. ㅎㅎㅎ 이 말도 하고 나니 참 우스운게.. 그 알고 지내던 때가 필자 나이 20대 초반이고, 그 도사님들 연세가 70, 80이셨으니... 근데 그 당시 70, 80이면 완전 할배였을 나이에.. 꼿꼿하시고 탱탱하셨던 기억이다. 그 중 한 도사님과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맨날 갈때가 다됐다는 이 도사님께.. 환갑도 안됐겠구만.. 했다가.. 아 이넘아, 내가 水사주라서 그렇지 여든 넘은지 몇년짼데.. 하신게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 동안의 조건은 수水에 있다. 사주 팔자에 수가 많거나 수대운을 지나고 있으면 잘 안늙는다. 도사님들이 대부분 동안이셨던 이유도.. 다 이 수의 영향이다. 일단 명리학을 오래 파신 역학자들은 아무래도 행동적인 목화요소보단 생각하는 금수요소가 많고, 그 중에서도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수를 많이 가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만 봐도.. 壬子 水년에 태어나 초반기에 수대운을 지나쳤다. 책 2만권 읽고, 머리 싸매고 컴퓨터 프로그램 짜고, 사주 주역 공부한 이유가 다 내 팔자와 대운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가장 강한 양陽일주인 까닭에 20살 때 30살이상 소릴 들었다. 대학 신입생 신구대면식에서 예비역도 아니고.. 새로오신 교수님? 소릴 들었을 정도..ㅎ

 

사주팔자에 수가 많으면 동안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사주팔자에 화가 많으면 노안일 가능성이 높다. 많지 않더라도 년주年柱나 시주時柱보다는 일주日柱와 월주月柱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여기에 사주명리학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강한 힌트가 존재한다. 처음 본 사람의 사주를 모른다. 생일을 모른다고 하는게 더 맞을지도... 그런데 나이는 안다. 나이보다 동안으로 보인다. 그럴 때 특별히 할말이 없다면..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여름 좋아하실 것 같은데?'

 

노안이라면... '올 여름 너무 더웠죠?'

 

일간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대부분 동안인 분들은 몸이 차고 겨울보단 여름을 좋아한다. 반대로 노안들은 여름을 싫어한다. 그런데 왜.. 둘다한테 여름으로 얘길 거냐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 사람은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부이고 그들 중 대부분은 계절을 좋아하는게 아닌 추억을 좋아하는 것이고 말이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양이기 때문에 음의 계절인 겨울 자체를 좋아하려면 엄청난 양편중 사주여야 한다. 대화란건 확률이 높은 쪽이어야 상대편의 반응을 얻어내기 쉬우므로 좋아도 여름, 싫어도 여름이어야 한다. 또 동안들은 생각하기를 좋아하기에 움직이는 걸 크게 즐기지 않는다. 노안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가만있기 보단 움직이는 쪽을 택한다. 성향도 생각과 행동으로 나뉘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말이 많아진다. 이 많다는 건 하고 싶은 말을 참지않는 것을 말한다.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는 것도 현상적으로 사실이다. 그 말은?? 노안은 말이 많다. 말이 많다는 건 비밀이 없다는 의미도 함께 가진다. 그러니 노안들에게 비밀 얘길 하는건 소문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다. 반면 동안들은 말이 없다. 조용하다. 비밀도 많다.

 

또 하나 동안과 노안을 볼 때 삶의 지혜를 하나 드린다면... 같이 밥을 먹는다. 더치페이를 하자고 말하고 간게 아니라면.. 노안은 자기 살려는 경향이 강하고, 동안은 더치를 하면하고 아니면 얻어먹는 걸로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삶의 포인트가 나온다. 노안인 사람과 함께 밥 먹을 때 무리하게 계산을 하면 돈쓰고 밥 사주고도 좋은 느낌을 못준다. 동안인 사람과 함께 밥 먹을 때 얻어 먹을게 아니라면 미리 계산하면 좋은 느낌을 줄 수 있다.^^

 

동안인 사람이 자신이 동안인걸 무조건 좋아하지도 노안인 사람이 자신이 노안인걸 무조건 싫어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상황의 동물이라 자신이 가진 걸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동안이라, 노안이라.. 이렇죠? 저렇죠?하고 단정해버리는 건 상대에게 찍히는 지름길이니 명심하시길...

 

 

 

인컨설팅 연구소    이동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