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있어 사주명리학에 관한 가장 큰 착각은 사람이 자기 사주에 맞는 직업을 가질 것이라는 착각이다. 의사와 변호사란 직업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한국에서 가장 갖기 힘든 직업은 단연 의사다. 변호사도 로스쿨이 생기는 전후로 예전 사법고시 시절보다 되기 쉬워진 건 사실이지만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해서 로스쿨 입시와 변호사 시험을 차례로 합격해야 하므로 여전히 의사 못지않게 갖기 힘든 직업이다. 그렇게 힘들게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된 사람들에게 필자가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예? 의사요? 이 사주는 의사 사주 아닌데?'

'이 사주로 변호사를 해요? 까딱하면 굶어 죽어요.'


직업을 갖는 것과 그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래서 사주를 정밀하게 보는 명리학자들은 학업운과 직업운을 나눠서 본다. 대학 졸업자가 정말 많지만 대학 전공에 맞는 직업을 가지는 사람의 비율이 적은 것도 사주와 현실이 동일함을 나타낸다.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성적이 안돼서 그렇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수의사, 약사와 판사, 검사,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교사, 외교관, 사무관 등이 되기 싫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런 직업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대체로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점이고 중산층 이상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이며 결혼시장에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다는 점에 더해 자신의 삶이나 부모와 가족의 삶에 사회적인 의미의 프라이드까지 느끼며 살 수 있게 한다는 점까지 포함한다. 그런 이유로 성적만 된다면 자신의 적성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관련학과를 선택하거나 대학을 다니면서도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이렇게 선망하는 직업을 갖기까지의 과정과는 다르게 직업을 가진 후에 경험하는 막막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직업이든 그 직업으로 가는 길의 대부분은 책을 암기하고 시험을 치는 행위를 잘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그 직업으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직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사주 인자가 있어야 유리하다. 간단한 예로 피를 못 보는 의사와 말을 잘못하는 변호사는 생각만 해도 막막하지 않겠는가? 사주팔자에 피를 보지 못하는 인자가 있는 사람이 외과의사가 되고 말을 잘하는 인자가 없는 사람이 변호사가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의대에 진학해서 해부학이란 강의를 패스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케이스가 흔하고 재판 관련 과목을 이수하지 못해 사법연수원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케이스가 그래서 발생했던 것이고 억지로 억지로 직업에 이르는 과정을 패스한다고 해도 전쟁터라는 실무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이 늘려있는 게 현실인 것이다.


과거의 의사는 현재의 한의사와 약사가 한 일을 했었다. 항생제와 소독약이 없었으므로 수술이 불가능했기에 수술은 과거 의사의 몫이 아니었고 외상환자는 피부에 약제를 바른 상태에서 낫기만을 바랬다. 그러니 의사가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무관한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과거 피를 보는 직업은 어떤 게 있었을까? 조선시대엔 백정이 피를 보는 직업이었다. 실제로 백정은 소를 도축해서 가죽을 벗기고 정형하고 발골하는 일까지 현재와 동일한 일을 했었다. 현대의 피를 보는 의사, 대표적으로 외과의사의 사주는 과거 백정의 사주와 유사하다. 죽일  있는 사람이 살릴 수도 있는  역학의 이면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피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혹시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에게 아무나 할 수 없는 이런 직업들을 강요하고 계신 건 아닌가 묻고 싶다. 암기 잘하고 시험 잘 치는 것이 누구에겐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직업을 갖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다시 입시시즌이 왔다. 대학 전공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학교에 목숨 걸고 전공에 목숨을 건다. 대입 수험생과 그 부모는 사실 고립된 사람들이다. 부모의 경우 과거 자녀들이 현재하고 있는 경험을 했으나 시대가 바뀌고 삶에 찌들리다보니 다 잊어버렸다. 그러니 같이 고립되는 것이다. 재수도 있고 삼수도 있고 편입도 있고 유학도 있고 대학원도 있다. 그리고 직업교육기관도 있고 아예 40대, 50대에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큰일이 날 것 같지만 풀고 다시 끼우면 된다. 단추가 싫다면 자크 달린 옷이나 후드를 입을 수도 있다. 숨 쉬는 게 즐겁고 밥맛을 계속 느낄 수만 있다면.. 살아가다 언제든 하고 싶은 게 생길 것이고 그 하고 싶은데에 에너지를 쏟게 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전공에 합격해도 그만두면 그만이니 어차피 확률은 5대 5 아닌가? 중요한 건 지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지치지 마시고 힘내셨으면 한다.

 

의사 사주 아닌 사람이 의사하고 있으면 그거 말고 다른 거 하라고 한다. 글  쓰는 사주면 메디컬 에디터 되라고 하고, 가르치는 사주면 치료보다 예방이나 환자 교육을 하라고 한다. 만드는 사주면 의료기기나 용품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만들라고도 한다.  사주면 로스쿨 가서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 되라고 하고,  만드는 사주면 신약을 개발하라고 하고, 노래할 사주면 그냥 노래하라고 한다. 그게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고 당장은 아니지만 먹고사는데도  도움이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특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위와 같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콜라보 시대 아닌가? 적성에 맞지 않는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인컨설팅    이동헌

아이의 사주를 보러와서 부모들이 궁금해 하는 건 대략 세가지 인 것 같다. 자신의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가고 잘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지와 결혼은 잘할지, 언제할지와 부모랑 잘 맞는지, 계속 잘 지낼지 등이다. 그런데 필자가 아이사주를 꼭 봐야한다는 이유는 부모의 이 세가지 궁금증에선 빠져 있다.

 

필자가 아이의 사주를 꼭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사주를 봄으로서 자신의 아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이의 부모에게 사주를 들려줄 때마다 부모가 하는 소리가 있다.

 

'아~! 우리 애가 그러는 이유가 그거 였어요?'

 

나는 그 분의 아이를 본적이 없다. 단지 그 아이의 사주만 앞에 두고 말씀을 드릴 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가 어떤 아이라고 말하면 맞다고 맞장구치고, 그 아이의 행동이 그런 이유가 어떤 것이라고 알려드리면 위와 같은 답을 한다. 물론 자기 아이는 전혀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낳고 키우고 있지만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담 계속되면 수긍을 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자식도 마찬가지다. 매일 보고, 얘기하고, 정을 나누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을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익숙하고 혈연이라 생기는 끌림이외에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전무하다. 더구나 배려인자가 있는 사람들은 집에서 하는 행동과 밖에서 하는 행동이 180도 다른 경우도 있기 때문에 나중에 저 사람이 내가 같이 살던 가족이 맞냐고 하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래도 부모인데, 그래도 자식인데, 그래도 형제자매인데 하는 그래도를 이유로 참고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잘 알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 부모가 아이한테 이기란 말이 아니다. 부모와 아이는 한편이므로 자신의 편에 대해 제대로 알고 공동의 목표이자 적인 사회를 대상으로 합심해서 싸워 나가야 한다. 사회적응부터 사회진출까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자신의 막연한 기대로만 육아를 진행한다면 중학교 이후엔 손 쓸 수 없는 단계로 흘러가 버린 자녀를 경험하게 된다. 실제 개인상담을 하다보면 중학교 때 이미 탈선의 길로 빠진 자녀를 둔 분들을 가끔 보게 된다. 이럴 경우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은 평범한 또래로 돌아올 대운이 올 때까지 가정과 연결고리만이라고 이어놓은 상태로 기다려보자란 말 뿐이다. 보통 자녀가 탈선의 길로 들어가면 내 자식 아니라고 내치는 아버지들이 많다. 그리고 사실 부모가 성인이전의 자식에게 무조건적으로 해줘야할 의무인 경제적인 지원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되면 유일한 연결고리라 할 수 있는 용돈 즉 경제적인 의존이 사라지기 때문에 실제로 부모와 자식의 연결고리도 사라져 버린다. 설마 돈으로 부모와 자식의 연결고리가 지속될까 하는 의심을 하는 분도 있겠지만 항상 말씀드리는 부분이다. 현대사회에서 돈은 피와 같기 때문에 돈줄은 생명줄이고, 그 돈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만 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이다. 바꿔 말하면 어떻게 자녀에게 용돈을 주느냐에 따라 자녀의 성장결과가 반전되기도 한다.

 

사람은 사주 구성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 필자가 쓴 첫번 째 일반 대중들을 위한 책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는 이러한 사람의 차이를 전해드리는 책이다. 타고난 사주에 따라 그 사람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지를 알려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을 출간 후 유치원선생님과 초등학교선생님들의 이메일을 자주 받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됐고, 실제로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너무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어떤 아이인 줄 아는 것만으로 교육에 도움을 받고 있다면 사주구성에 따른 육아 및 교육방법까지 안다면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의 사주를 꼭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방식으로 아이의 사주를 보는 것은 반대다. 기존의 방식이란 위에서 말한 바와같이 아이 사주를 볼 때 관점을 말한다. 이 아이가 커서 뭐가 되고 돈을 얼마나 벌지를 묻지 말고,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어떻게 해야 부모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해야 공부를 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물어라. 아이의 사주를 보면 안된다고 말하거나 안본다는 철학관 운영자들은 아마도 틀리는게 두려워서 이거나 아이의 사주를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된다. 7살 아이의 사주를 보고 이 아이가 공부를 잘할거라고 얘기하는 건 철학관의 간판을 내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 6학년 아이의 사주를 보고 공부를 잘하느냐 마느냐도 마찬가지다. 바로 몇년 후에 현실로 증명될 일을 말했다가 틀리면 요즘같은 인터넷시대에 바로 간판을 내려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 같아도 어설픈 사주공부를 한 상태에서 철학관을 하고 있는 거라면 자신없는 분야는 사주보는게 아니라고 사전에 담을 칠 것이다.

 

그러니 아이의 사주를 보러가면 결정론적으로 묻지 않아야 한다. 그 아이의 자체, 자신이 낳아 놓은 그 자체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어떤 성격이고,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배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부모는 그것을 알고 그러한 환경만 조성해주면 된다. 원래 사람을 지 혼자 커는 것이지 누가 키워주는 게 아니다.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다. 보도블럭 틈사이 먼지에서도 잘자라나는 잡초와 다를바 없는 한 강인한 생명체이기에 그렇다.

 

 

인컨설팅 역학연구소    이동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