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가 정의한 부자란?
부자는 재산이 아니라 셈법이다
知足者富。지족자부.
'만족을 아는 자가 부자다.'
도덕경 33장의 이 네 글자는 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재정의다.
부자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만족을 아는 사람이다.
듣기 좋은 위로처럼 들린다.
가난한 자의 정신 승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산수다.
그리고 그 산수는 냉정하다.
부유감은 분수(分數)다.
가진 것이 분자, 원하는 것이 분모다.
백을 가지고 이백을 원하는 사람의 부유감은 이분의 일이고,
오십을 가지고 오십을 원하는 사람의 부유감은 일,
완전수다.
세상은 분자를 키우는 법만 가르친다.
더 벌고, 더 모으고, 더 불리는 법.
그런데 분자가 커지는 동안 분모가 가만히 있어 주지 않는다는 것,
여기에 이 산수의 함정이 있다.
소득이 오르면 눈도 오른다.
예전에는 없어도 되던 것이 이제는 있어야 하는 것이 되고,
한때 사치이던 것이 어느새 기본이 된다.
쾌락 적응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사람의 뇌에 새겨진 기본 설정이다.
좋은 것은 곧 당연한 것이 되고,
당연해진 것은 더 이상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분자가 두 배가 되어도 분모가 함께 두 배가 되면 부유감은 제자리다.
평생을 달렸는데 제자리인 러닝머신.
더 벌어도 늘 빠듯한 삶의 정체가 이것이다.
지족은 이 러닝머신에서 내리는 유일한 기술이다.
분모를 고정하는 것.
나에게 충분한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것이 분자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자는 벌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충분의 선이 없이 벌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충분선이 있는 사람에게 그 선을 넘는 소득은 전부 잉여의 기쁨이 되지만,
충분선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득도 부족의 증거가 된다.
같은 돈이 한쪽에서는 풍요로 계산되고
다른 쪽에서는 결핍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것은 통장이 아니라 이 계산식이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이 산수를 자주 확인한다.
객관적인 형편과 주관적인 부유감은 놀랄 만큼 따로 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산가가 늘 쫓기듯 살고,
수수한 살림의 사람이 넉넉하게 산다.
전자에게는 분모가 없고 후자에게는 있다.
전자는 얼마가 있어야 충분하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답이 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은 도착이라는 것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니 오늘 해 볼 계산은 이것이다.
나의 충분은 얼마인가?
체적으로, 숫자로, 어떤 살림이면 나는 족한가?
이 물음에 답을 가진 사람은 이미 절반쯤 부자다.
도착 지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만족을 아는 것은 야망의 포기가 아니라 도착의 기술이다.
분모 없는 부는 아무리 커도 허기이고,
분모 있는 삶은 소박해도 잔치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배운 <상하지 않고 오래가는 법>' 중에서...
본 책은 이동헌대표님의 신간 에세이로 7말8초에 출판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