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으로 생각하기

누르고 꺾으려는 불쌍한 사람들...

Eastlaw 2024. 11. 18. 06:29

혼자보단 짝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음양은 공존... [비엔나 밤거리 by SUE]

 

필자가 개인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사주 좋은 여자분들에 관한 것이다. 개인 상담 전에 본 사주 좋은 여자분들은 이미 경영 전반에 나서 계시거나 대표의 신임을 받고 있던 사원이거나 CEO나 거부들의 자제였다. 그래서 필자가 필자의 의뢰인에게 따님이나 조카 따님, 친구 따님, 여직원 등의 사주가 좋다 하고 신뢰하라고 말해 주면 그녀들을 믿고 하고자 하는 바대로 기회를 주었고, 그녀들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9년 전에 개인 사주 상담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계속해서 보아왔던 이상함은 이것이다. 왜 사주 좋은 여자분들이 저 모양으로 살고 있을까? 이유는 이랬다.

첫째는 형제에 밀리다.
둘째는 가족에 치이다. 먹여 살리려고...
셋째는 사회에 밀리다.
넷째는 현실에 치이다. 남편, 가족, 시댁, 친정을 위해...
다섯째는 그렇게 세뇌되다.

이런 여성들의 공통점은 필자가 사주가 좋다고 말했을 때의 반응에 있었다.
‘제 사주가 좋다구요? 사주가 좋은데 왜 이렇게 살고 있죠?’
사실 왜 그런지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항상 양보하고 베풀다 보니 사주 좋은 자기 판단이 아닌 타인의 판단을 따르거나 자신의 좋은 운을 남에게 넘겨주다 보니 그렇게 그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20년 전부터 알파걸이란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고 능력 있는 여성이 사회를 주도한다는 말도 나왔다. 마마보이란 단어만큼은 아니지만 파파걸이란 단어로 딸을 중시하는 풍토가 생겨난 것도 같았다. 

필자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말씀드리면서 인류가 자연 속에서 각자 연명하던 시대에서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우두머리를 두고 모여 살기 시작한 시점을 첫 번째 '개벽'이라고 말씀드렸다. 첫 번째 '개벽'으로 인류가 자연은 극복하기 시작했지만, 인간 간의 계층이 생기는 지배, 피지배의 계급 문제로 또 다시 생존의 위협에 극에 달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등한 '민주사회'로 전환하기 시작한 시점을 '다시 개벽'이라고 말씀드렸다. 이를 개벽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는 이유는 한 지역, 한 국가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상에서 동시대에 그 변화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 '다시 개벽'으로 인해 지배계급의 힘은 약해지고 시민들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는 투표 제도가 보편화되었다. '다시 개벽'은 노예, 노비 제도를 없앤 것은 물론 식민지라는 국가 간의 지배, 피지배도 점차 없애 나갔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국가가 민주화되어 평등해지자 서로 다름을 가진 남과 여도 점차 남성우월주의에서 벗어나는 모양을 보이는 듯했으나, 아직은 먼 것 같다. 특히나 상승하던 여성의 인권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다시 주춤하는 듯하다. 전시에 준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체력을 갖춘 남성이 여성보다 유리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여성의 인권은 올라가기 시작했고 거기에 긴장한 남성들의 반발도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한 갈등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다시 여성을 누르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 보이는 정책이나 일들이 다시 여성의 인권을 제한하는 방향이다.

한국에서는 갑자기 여대를 없애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인구 감소로 대학이 줄어드는 마당에서 생존을 위한 변화는 존중하지만 여대라서 입학한 대학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인 재학생도 모르게 남녀공학으로의 전환을 공작하는 건 심각한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들키니 아니라고 발뺌하는 것이고 말이다. 여성인권을 가장 대변해야 할 여대부터 그 구성원인 학생을 배제한다면 누가 여성을 존중하겠나?

어차피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서로 존중하고 돕지 않는다면 결국은 모두가 무너지게 된다. 실제 한국이 가진 출산율의 문제는 이 동업자 정신이 무너진 것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정에서부터 여자를 누르고 무시하는 풍토는 시대가 개인화되고 여성의 사회적 능력이 제값을 받으면서 여성의 탈피와 독립으로 이어졌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본다.

안 힘든 사람은 없다. 
안 불쌍한 사람도 없다. 
여기에 비교는 무의미하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힘들고, 그냥 자신이 불쌍한 것이다.
이런 어디에 표하기 힘든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사람 간의 갈등이 되고 그게 넘치면서 남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또 어떤 개벽으로 해결이 될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비교를 멈춘다면 전쟁도 바로 끝나지 않을까?
모두가 힘든 시대다. 비교보단 나 힘들어, 아무도 몰라죠. 아무들도 힘드니 자기 코가 석자라 당연한거야.. 생각하면 나만 참으면 모두가 참는 것이고 그 참는 게 인생이고 살아가는 것이니.. 이게 해결책 아닐까?

딸을 누이를 누르던 풍토가 젠더갈등이라는 용어로 사회화되고 있다. 그속엔 아들이 힘들다에서 남자도 힘들다란 자조가 섞여 있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나이든 여자들이 아들 편을 들면서 끝이 났다. 

현재 가장 큰 사회문제의 원인이 가정의 이런 결론에서 출발했는데 지금 사회가 이 문제를 또 다시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 짓는다면 아마도 미래에는 인간을 찾아보기 힘들어 질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니가 불쌍한 건 맞지만 남들보다 더 불쌍하거나 덜 불쌍한 건 틀렸다.

사람은 자기 사주대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이다.
사주는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인컨설팅    이  동  헌